아침에 나서려는데 가나메가 어딜 갈거냐고 물어본다. 후마윤 무덤에 갈거라고 했더니 어차피 가는 길에 있으니 쿠타브미나르에 꼭 가보라며 권한다. 사실 너무 멀어서 포기했던 곳인데, 마음을 다시 고쳐먹었다.
버스를 타기 위해 뉴델리역에서 1킬로 남짓 떨어진 코노트 플레이스로 향했다. 한참을 걷다보니 어느새 옆에 인도인 한 명이 다가와 말을 건다. 날씨가 좋다면서......처음엔 무슨 꿍꿍이가 있나 싶었는데, 그건 아니었다. 다르질링에서 유학온 대학생이라면서 자기는 이슬람교도인데 아침 기도시간까지 이렇게 그냥 산책을 한다고 한다. 델리에서는 트러블이 곧잘 생기므로 조심하라며 버스정류장까지 데려다주고는 헤어졌다. 이방인에게 스스럼없이 다가서는 인도인들의 순수한 모습에 아침부터 기분이 좋다.
버스는 출근길이어서 그런지 정말 2호선 신도림역 저리가라다. 겨우 자리를 잡고 서있었지만, 덜컹거리는 차와 계속 밀려드는 사람들로 나는 큼직한 배낭을 멘 채 거의 압사수준이 되었다. 그런데 그 순간, 바로 앞좌석에 앉은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께서 갑자기 일어나 나에게 자리를 양보하시는 게 아닌가? 아무리 그래도 할아버지의 자리양보를 냉큼 받을 수는 없어, 손사래를 치며 한사코 거절했는데 거의 완력으로 나를 자리에 앉히고 만다. 무거운 가방을 들고 있는 힘든 사람이 있다면, 나이를 떠나 자리에 앉는게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그네들의 모습이 일견 부러워보였다.
이 이상한 경험 이후 난 가끔 발칙한 상상을 해본다. 우리네 지하철에 지정된 노약자석이 오히려 거꾸로 우리들을 더 각박하게 만드는 건 아닌지 말이다. 사실 자신이 너무 힘든 상황이 아니라면 자신보다 더 힘들어보이는 사람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건 전통을 떠나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감정의 결과다. 따라서 그러한 행동의 근저에는 반드시 '자발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양보대상이 노인, 아이를 데리고 있는 엄마, 장애인, 임산부는 물론, 피곤해보이는 학생, 아파보이는 청년,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숙녀가 될 수도 있지만, 그 양보대상이 나보다 더 힘들거라는 판단의 몫은 순전히 자리를 먼저 차지한 사람에게 있다. 지금까지 난 그런 보편적인 정서가 완벽하진 않더라도 우리 사회에서 잘 통용이 되어 왔다고 믿는다.(서있는 할아버지 앞에 앉아있는 청년이라도 속단하지 말자....그는 다리가 삐었을 수도, 속이 안좋을 수도, 일에 지쳐 도저히 설 수 없는 피치못할 상황에 처해있는 것이라고 난 항상 생각한다.)
헌데 노약자석이란게 생겼다. 칼로 자르듯, 영역을 구분해 이용자를 구분해놓았다. 일반석에 앉은 청년들은 노약자석을 핑게로 자신의 앞에 서있는 사람이 힘들어하고 있는 지에 대해 더이상 신경을 쓰지 않는다.(당연히 힘든 사람이라면 노약자석으로 갔겠지! 우리는 못 앉게 하면서, 왜 노인들이 일반석까지 오는거야?) 노약자들은 몇 개 되지 않은 좌석에서 누가 더 나이가 많은지를 놓고 옥신각신 다투며 더이상 '공경하기 어려운' 어른으로 희화화되기 일쑤다. 정작 노약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몇 개의 좌석이라도 확보해놓자는 좋은 취지에서 만들어진 노약자석이지만, 이제 노약자들은 거기를 벗어나면 환대받지 못하는 천덕꾸러기로 전락했고, 일반인들에게서는 '자발성'의 의지마저 빼앗아 버렸다. 젊은이들이 더 이상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다면, 어른들이 '스스로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위치를 회복하고, 인간보편적인 감성에 호소하면서 '자발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사회적 공감대를 키워나가는 것이 더 우선이지 않았을까? 전통을 들먹이며 강제하거나, 혹은 너무나 쉽게 노약자석을 만들면서 '제도'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우리에겐 진정 문제가 없는 것일까?
버스로 30분 정도 걸려 도착한 쿠타브미나르는, 안 왔으면 후회 할 뻔 했다. 입구에서부터 73m의 크고 높은 미나르(탑)이 우뚝 서있다. 12세기 델리의 힌두교세력을 물리치고 정권을 잡은 이슬람 노예세력들이 승전기념으로 지은 탑이다. 그저 단순한 탑은 아니고 주변 이슬람사원의 미나렛 역할도 한다.
탑 모양 자체가 특이하다. 5개의 마디가 있는데, 제일 아래 직경 15m가 제일 위 2.5m까지 줄어들면서 독특한 체감비를 선사한다. 각 층마다 발코니처럼 튀어나온 부분이 있는데, 마치 라푼젤에 나오는 탑같다. 내부에 계단도 있다고 하는데, 30년전 사고 이후 더이상 일반인 개방은 하지 않는다고 한다.
유적지에 남아있는 아치문의 수려한 비례와 현란한 디테일은 보는 이에게 현기증을 선사한다. 붉은 사암에 새겨진 아라베스크 문양과 코란의 글귀는 엄청난 공력이 들어갔음을 절로 느끼게 해준다.
주변의 이슬람 사원도 상당히 독특하다. 마치 앙코르와트에 온 것처럼 기둥 하나, 벽 하나 그냥 세워진 게 없다. 이 유적지가 온전히 제대로 남아있었다면, 정말 볼만했을 것같다. 원래 힌두교 비슈누신전이 있던 자리에 세워진 이슬람 사원이라 그런지 힌두교 냄새가 많이 난다.
유적지를 나와 만원버스를 다시 타고 뉴델리 남부로 향했다. 정류장에서 후마윤 무덤까지는 거의 3-4km. 그 많던 사이클릭샤가 하나도 안 보여, 할 수 없이 더운 날씨 속에 산책하듯 걸어갔다. 아침도 부실하고 점심도 먹지 않은 상태여서 몸은 탈진상태였지만, 더 이상 쓸 기운이 없을 즈음 도착한 후마윤 무덤은 너무나 아름다워 그만 정문에서부터 넋을 빼앗겼다.
후마윤은 인도 무굴제국의 2대 황제다. 무덤에 정원 양식을 끌어들인 것이나, 정방형으로 지어진 엄격한 대칭형의 안정감있는 건물은 모두 5대 황제 샤자한이 건설한 타지마할의 원형이 되었다.
<무덤 입구>
무덤으로 가려면 지하통로를 통과해야 한다. 마치 부석사의 악양루 밑을 통과해야 무량수전에 다다를 수 있는 것처럼......붉은 사암으로 지어진 건물은 햇빛을 받아 더욱 더 붉게 타오른다.
입구에 서서 바라본 후마윤 무덤의 전경......빛과 어두움의 극명한 대비.....그리고 천상의 건축물......후마윤 사후 페르시아에서 온 왕비가 지은 건물답게 페르시야 양식과 인도양식이 혼합되어 있다. 이 곳은 쿠타브 미나르와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사람도 별로 없어 멋진 공간감을 마음껏 즐기고 스케치도 하며 시간을 보내다 다시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근처에 있는 인디아게이트를 찾아갔다. 1차 세계대전 중 전사한 인도 군인 9만여명의 넋을 기리기 위한 기념물로 1931년에 완공되었다고 한다. 그걸 떠나 인디아게이트는 인도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에 자주 등장한 관계로 인도에 다녀왔다는 증명사진을 찍는 빠질 수 없는 배경이 된 곳이다.
이제 너무 지쳐서, 달려드는 오토릭샤꾼들과 흥정해 잔타르 만타르까지 갔다. 참 흥미롭다. 옛날 천체를 관측하던 건물들이라고 하는데, 그 모양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전체적인 배치 또한 잘 모르겠지만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 듯했고, 계단으로 이루어진 갖가지 기하학적인 모양은 신비롭기까지 했다. 하지만 세계문화유산치고 관리가 너무 소홀한 것같다. 유적지 바로 옆에는 집시들이 천막을 치고 생활을 하고, 그 내부에서는 소변냄새가 진동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도 너무 피곤해 바나나를 몇 개 사서 잠시 쉬고 있으니, 지나가는 인도인들이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마음에 드냐? 어디 가봤냐?......예전 그리스에 처음 갔던 때도 그랬다. 그만큼 자신들의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것이다.
다시 숙소로 터벅터벅 걸어 갔다. 아침에 버스를 탔던 코노트 플레이스를 거쳐 파하르간지의 시장통에 들어서니 여전히 소들과 릭샤들과 사람들로 시끌법적하다. 피곤하지만 뭔가 생기를 불어넣어주는 마력이 있는 곳이다. 일부는 나에게 다가와 마약을 사라는 사람도 있고, 암달러상도 있다. 그리고 사설여행사로 안내하려는 삐끼까지(이제는 그들을 상대하는 것도 익숙해졌다).....숙소로 돌아와 일본인 친구들과 함께 저녁을 먹으러 갔다. 우리는 볶음밥과 맥주를 한 잔 하며 또 열심히 수다를 떨며 시끄러운 델리의 밤을 즐겼다.
<내 옆 친구가 가나메, 그리고 그 옆이 소방경찰관인 히로유키 사또다. 다들 잘 지내는지?>
이 곳 사람들은 뭔가가 매력적이다. 그게 그들의 종교적 관념때문인지, 아니면 그들의 인정많은 성품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때론 그 친절함이 상업성과 결탁해 속은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다. 너무나 새로운 세계다. 보이는 것도, 그리고 만나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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