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크라코우다. 17세기 수도를 바르샤바로 옮기기 전까지 왕들이 살았던 폴란드의 수도......바르샤바가 2차 세계대전의 와중에 산산조각난 것과는 대조적으로 크라코우는 살아남아 중세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전해준다. 나찌 사령부가 주둔한 때문이라 하니 역사의 아이러니다. 여타 동유럽도시들과는 다른, 약간은 무겁고 약간은 포멀한 분위기의 도시, 하지만 차분하면서도 진득한 맛이 넘치는 도시이기도 하다.
크라코우의 중심지는 뭐니뭐니해도 시장광장이다. 유럽을 통틀어 베니스 산마르코 광장에 이어 두번째로 큰 광장답게 사람들로 항상 북적이는 곳이다. 관광객들, 거리 공연을 하는 예술가들, 노천카페들로 가득차 있고, 아직도 이름에 남아있는 시장이 열리는 곳이다. 그리고 광장 한켠의 초콜릿 색깔의 성당, 성 마리안 성당이 돋보인다.
성 마리안 성당은 나팔수가 직접 나와 시각을 알려주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구시가지로 들어가는 성문의 모습이다.
이제 강변의 언덕위에 자리한 바벨성으로 향한다. 바벨성은 폴란드 왕들이 머물던 거처이자, 폴란드인들에게 마음속 성소와 같은 곳이다. 무려 11세기에 시작해 500여년 동안 지어지면서 여러 부속건축물들을 거닐게 되었는데, 세월만큼이나 다양한 건축양식들이 혼재되어 있다. 별도 입장권을 끊고 성 안 실내 인테리어도 둘러보았지만, 수 없이 많은 궁전들을 봐온 나로서는 그리 큰 감흥이 일지는 않았다. 하지만 주변을 천천히 걸어서 산책하기엔 그만이었다.
이젠 바르샤바다. 사실 여행하면서 도시의 인상을 좌우하는 것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유난히 안좋은 일이 겹치면서 정말 억울한 평가를 받아야만 하는 도시들이 있다. 내겐 바르샤바가 딱 그 케이스였다.
야간기차를 타고 아침 7시 바르샤바 중앙역에 내린 나는 주변의 집시들과 걸인들로 약간 긴장된 상태였다. 헌데 내 귀중품을 보관했던 작은 가방이 그만 찢어지고 만 것이다. 나와 배낭여행을 4차례 이상 했던 가방이었다. 가까스로 옷핀을 이용해 겨우 빵꾸를 때우고 다니면서 주변 가방가게를 돌아다녀봤지만, 가격이 정말 비싸다.(중앙역은 생각보다 크다. 역시 예전 바르샤바조약기구를 이끌던 동유럽 맏형답게, 다른 동유럽 국가들보다 대국적 기질이 보인다!!)
일단 유스호스텔에 가기로 했다. 인포메이션 센터가 열기까지 좀 기다렸다가 우선 유스호스텔 지도를 한 장 받았는데, 이 지도에 위치가 잘못 표시된 통에 트램에서 내린 후에도(역에서 트램 찾는 것도 한참 걸렸다. 정말 역 주변은 번잡하고 넓어서 초행자들이 길 잃어먹기 십상이다.) 무려 1시간 이상 헤매야 했다.
<역에 내리면 보이는 커다란 건물, 문화과학궁전 : 도시의 이미지와 스케일을 완전히 망치는 건물이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사실 내가 바르샤바에서 해야 할 임무 중 하나는 라트비아 비자를 받는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는 발트3국(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중 리투아니아만 무비자 협정을 맺고 있었다. 그런데 세 곳 중 한 곳의 비자만 받아도 세 나라 모두를 돌아다닐 수 있도록 삼국간 협정이 있었는데, 그렇다면 일단 리투아니아에 무비자 입국하면 라트비아는 비자없이도 국경을 넘어갈 수 있는지, 아니면 리투아니아와 관계없이(말 그대로 비자를 여권에 붙이지 않고 무비자입국했기 때문에) 라트비아 비자를 별도로 받아야 되는 것인지 대사관마다 말이 서로 틀렸다. 일단은 안전빵으로 비자를 받기로 했다.
뙤약볕 밑에서 헤매다 간신히 얻어들은 정보로 버스를 타고 어렵사리 대사관에 갔는데 이게 웬걸~! 라트비아가 아니라 리투아니아 대사관이다.....내가 인포메이션센터에서 분명이 리투아니아가 아니라 라트비아라고 수없이 얘기했는데....맥이 풀렸다. 이젠 더 걸을 힘도 없어서리 택시를 탔다.(여기 택시는 모두 콜택시다. 다행히 친절한 기사 한 분이 연락해줘서 조금만 기다릴 수 있었다) 라트비아 대사관은 가까이 있었다. 기사 얼굴이 짜증 만땅이다. 그리고 이번엔 대사관의 불친절과 싸워야 했지만 어쨋든 비자를 신청해놓고 올 수 있었다.
중앙역의 인포메이션센터에서 속은 게 하나 더 있다. 리투아니아 빌뉴스행 국제버스 터미널을 물어 역 바로 바깥쪽 티켓판매소에 찾아갔는데 여기가 아니랜다. 거기서 다시 얻어들은 정보로 서부버스터미널에 가서 간신히 끊을 수 있었다. 이 모든게 찢어진 가방을 안고 뙤약볕 밑에서 일어난 일이다.....
어쨋든 맥도날드에서 콜라 한잔을 시켜놓고 짜증을 삭힌 다음, 구시가지로 향했다. 버스와 트램을 갈아타면서 쇼팽뮤지엄을 거쳐 바르샤바 대학, 성 십자가 교회를 거쳐 구 왕궁까지 갔다.
구시가지는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그런데 참 놀라운 것이 이 모든 것은 2차 세계대전이후 복원한 것이란다. 철저히 파괴된 시가지를 폴란드 사람들은 옛 지도와 사진으로 똑같이 복원해낸 것이다. 도시는 아기자기하고 사람들은 흥겨웠다. 자신들이 사는 도시에 대한 애착이 남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구시가지를 하릴없이 돌아다니다가 다시 숙소로 돌아오는 길......다시 악몽은 끝나지 않았다. 오늘 너무 땀을 빼서 정신까지 혼미해진 건가? 복잡한 구시가 속에서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간신히, 정말 간신히, 몇 명의 사람들 도움을 받고 트램을 두 번 갈아타며 다시 숙소로 돌아올 수 있었다.
정말 지독한 하루였다. 아마 내 인생에서 제일 많이 걸어본 하루였을 성싶다. 그래도 호스텔에 돌아와 찬 물로 샤워하고 밥먹으니 피로가 싹 가신다. 하지만 바르샤바 하면 당장은 이 아픈 기억이 먼저 떠오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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