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은 최악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더운 그리스에 사상 최악의 폭염이 몰아쳤다. 내가 묵은 4인용 도미토리에 묵은 외국인들은 체면가릴 거 없이 모두들 팬티바람으로 몸살을 치며 잠을 설쳐야 했다. 더워서 깨길 몇 번, 샤워를 하고 눕기를 반복하다 아침이 되자 비몽사몽 도망치듯 유스호스텔을 떠났다.
역무원실에 들러 발칸레일패스를 개시했다. 나이제한 때문에 이젠 조금 더 돈을 주고 1등석 패스밖에는 구입할 수 없었다.(발칸레일패스는 그리스, 마케도니아, 유고슬라비아(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로 쪼개지기 전이다.),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루마니아, 불가리아의 철도 자유이용권이다. 그런데 당시 한국의 여행사도 그 존재 자체를 몰라서 발권하는데 품을 좀 팔긴 했다. 하긴 그 때 동유럽에 간 한국인들이 거의 없었으니......)
1등석은 에어컨 바람이 빵빵하리라는 바램은, 창문을 모두 열어젖힌 기차가 플랫포옴에 들어오는 순간 산산이 깨져버렸다. 정말 손가락도 까딱하기 싫었다. 그저 멍때리며 그렇게 흐르는 땀을 운명처럼 받아들였다.
<오흐리드 호수가의 초기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 요한 카네오교회>
그리스 아테네에서 마케도니아의 수도 스코피에(Skopje)까지 기차여행을 하게 되면 그리스 국토가 얼마나 넓은 지 알게 된다. 아테네에서 아침 일찍 출발한 기차는 꼬박 여덟 시간이 걸려 그리스 제2의 도시 데살로니키에 도착한다. 여기서 1시간 30분 정도 기다린 후 베오그라드행 기차에 몸을 싣는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시원한 바람이 기차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한다. 북적북적한 기차 안에도 어느덧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가고 아무도 없다. 바깥 풍경도 그리스의 황량한 들녘과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시원한 바람과 지나가는 기차에 부딪히는 나뭇잎 소리가 더욱더 마음을 가뿐하게 만든다.
드디어 국경......그리스에서 출국스탬프를 받기 위해 40분을 기다린 후 기차는 국경을 넘는다. 국경에 잠시 멈춘 기차에 내려 비자를 받아들자 기차가 다시 출발한다.(지금은 무비자 입국이 가능해졌다) 제복을 입은 마케도니아 경찰 둘이 차표 검사를 하러 왔다. 땅딸막 뚱보와 홀쭉이 키다리다. 영어를 모르는 데다, 발칸패스는 처음 본 것같다. 기차표도 없이 이상한 걸 보여주는 동양인을 어떻게 처리해야 될 지 당황했나보다. 조금 망설이다가는 찍을 필요없는 패스에 스탬프를 꽝 찍고 나간다. 거기에 방금전 흔들리는 기차에 엎지른 콜라로 찐득해진 바닥을 밟고는 요란한 발자국 소리까지 내면서 말이다. 그 모습이 어찌나 우스운지, 덤앤더머가 따로 없다......ㅋㅋ
기차는 저녁 10시 15분이 되어서야 스코피에 역에 도착한다.(그리스보다 1시간 앞당겨진다) 그런데 세상에! 역에 아무도 없다. 옆앞에도 가게는 물론 지나가는 사람조차 없다. 캄캄한 밤이었지만, 미리 복사해온 론리플래닛의 지도를 보며 주변 도로의 형상 등을 근거로 대강 위치와 방위를 파악한 다음 유스호스텔을 찾아나섰다. 정말 조용한 시골동네같은 분위기다. 다행히 방향을 옳게 잡았나보다. 20여분을 헤맨 끝에 제대로 찾은 유스호스텔의 아무도 없는 4인실 도미토리를 독차지하고 여장을 풀었다.
<오흐리드 호수의 평화로운 전경>
다음날 호스텔에서 제공한 아침을 먹고 환전을 하기 위해 시내로 나갔는데, 마침 일요일이라 모든 환전소와 은행이 문을 닫았다. 지나가는 사람 붙잡고 막무가내 물으니 나를 시장으로 데려가 암달러상에 소개시켜 준다. 환율은 센 편이지만 할 수 없다. 오늘 쓸만큼만 환전하고 숙박비를 계산한 후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목적지는 남서쪽의 오흐리드 호수......마케도니아의 유일한 세계유산이다. 호수는 바이칼 호수처럼 지면이 꺼지면서 생성된 것인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곳으로 자연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기독교가 유럽에 첫 전파된 곳이기도 하여 아직도 많은 초기 로마네스크 교회가 호수 주변에 남아 있어 문화유산으로도 지정되어 있다.
스코피에에서 오흐리드까지 4시간 동안 차창밖 풍경은 우리네 농촌풍경과 비슷하다. 산길을 달려 도착한 터미널에는 이미 많은 호객꾼들이 나와 있다. 나는 그 중 제일 마음씨 착하게 생긴 아저씨를 따라 나섰다. 중심에서 약간 떨어진 곳이었지만 방도 깨끗하고 나의 요청에 간이 취사시설까지 마련해주었다.
오흐리드 호수는 바다처럼 넓다. 그 주변에 오흐리드 시가지가 모여 있는 모습이 무척 평화롭다. 수영하는 아이들, 낚시하는 어른들, 크고 작은 보트와 빠알간 지붕의 집들 사이로 난 구시가로 들어서면 초기 교회들을 만날 수 있다. 성소피아 교회, 화려한 이콘이 돋보이는 성 클레멘트 교회, 로마시대 바실리카와 성채, 바닷가로 튀어나온 성 요한 카네오 교회 등이 차례로 나타난다.
그런데 교회의 모습들이 참 독특하다. 화려한 것을 기대했다면 실망할 정도로 참 소박하다. 그냥 아무렇게 뚫어놓은 듯한 입구는 서유럽의 현란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저 지나가다 아무나 들어오라는 듯한 그 격의없음은 교회가 우리에게 무엇이어야 하는지 말해주는 듯하다. 예의 로마네스크 건축이 그렇듯 창을 만들기 어려운 구조로 인해 내부는 어두컴컴하다.(겉모습에는 창이 많이 나 있는 것같지만, 모두 창 흉내만을 낸 blind window이다) 하지만 벽면을 가득 메운 화려한 이콘은 이곳이 성소임을 말해주는 유일한 증거일 것 같다
<화려한 이콘이 돋보였던 성클레멘트 교회>
마케도니아는 시리아, 쿠바, 모나코와 함께 우리의 몇 안되는 미수교국이다. 하지만 여행하는 데 아무런 불편이 없다. 이들은 TV를 통해 우리나라를 잘 알고 있었고, 무척이나 친절하다. 더위에 지쳐 어느 빵가게 앞 벤치에 앉아 있었는데, 갑자기 나온 가게 주인이 빵이 가득 들어있는 비닐봉투를 한아름 나에게 안겨준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감사하단 말도 못하고 있는데, 이 아저씨 다시 가게에 들어가더니 정말 차디찬 스프라이트 캔을 들고 나와 건네준다. 세상에서 마셔본 가장 시원하고 맛있는 음료였다. 왜 나에게 이걸 주었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이유를 찾는 것은 조건없는 호의를 받는 것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리라......하지만 세상엔 아직 사람사는 냄새가 남아있었다. 그게 여행의 묘미다......
<로마시대 바실리카(공회장)>
<성소피아교회>
오흐리드 호수 건너편 저 멀리 알바니아가 보인다. 알바니아는 교통편을 고려할 때 지나칠 수 있는 국가가 아니고 어느 한 지점을 택해 입국한 후 다시 왔던 길을 거슬러 돌아나와야 하는 불편함이 있어 시간상 다음 여행으로 미룬 국가였다. 그런데 막상 여기까지 오고나니 가고 싶은 마음이 다시 굴뚝같이 커졌다.
오흐리드 시내와 근방의 교회들을 둘러본 후 버스를 타고 50분 가량 산을 타고 올라가면 가장 규모가 크고 멋지게 생긴 스베티 나움 교회가 나온다. 론리플래닛에 따르면 이 교회 바로 앞에 국경이 있다고 했으나, 그 국경에는 검문소 폐쇄를 알리는 표지판만이 덩그러이 있을 뿐이다. 대신 여기서부터 산을 타고 난 도로를 따라 3km 거리에 새로운 검문소가 설치되어있다고 했다. 그런데 그곳까지 가는 버스도 없다. 할 수 없이 산길을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사람 한 명 보이지 않는다. 트렉킹이 힘들어질 때 쯤 국경이 보인다. 비자값이 만만치 않다. 국경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까지 거리도 만만치 않은데 역시나 버스도 없다. 아쉽지만 발길을 다시 돌릴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다시 돌아오고야 말거야......다행히 그 한적한 국경에 차량 한대가 홀연히 마법처럼 등장했다. 운전사 아저씨를 꼬셔 히치에 성공했다. 단 30분만에 다시 오흐리드 시내다.
<알바니아 국경 가는 길>
<스베티나움 교회의 전경>
<스베니타움 교회에서 호수를 바라보며>
유고슬라비아에서 1991년 무혈 독립한 마케도니아이지만, UN에서는 아직도 정식국명을 F.Y.R.O.M.(The Former Yugoslav Republic of Macedonia)으로 쓴다. 굳이 '과거에 유고슬라비아였던'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인접국인 그리스의 요청에 따른 것이다. 역사 속의 '마케도니아'는 알렉산더 대왕의 고향으로 사실 그리스, 불가리아 등에 걸친 광범위한 지역이다. 그리스는 마케도니아를 그리스의 지적재산이라 주장하며, 지금도 마케도니아를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마케도니아 정부청사 모습>
마케도니아의 수도 스코피에로 되돌아온 나는 가볍게 시내를 둘러봤다. 정말 작은 곳이라서 볼 만한 것들은 모두 도보범위내에 있다. 그 중에서도 아래의 돌다리는 스코피에의 구시가(재래시장)와 신시가(마케도니아광장)을 연결하는 이 도시의 상징과도 같은 장소다. 15세기에 만들어졌다는데 그간 식민지시절과 세계대전, 유고시절과 독립을 모두 겪은 역사의 산증인인 셈이다.
스코피에에 있는 스베티스파 교회(church of sveti spas)다. 현지인들이 자랑스럽게 추천하기에 가봤다. 구시가에 있는데 오토만 시대 모스크(주변에 있다.)보다 높게 건물을 지을 수 없어 반지하에 예배당을 만들어놨다. 앞마당에는 마케도니아 국부(누군지는 모르겠다)의 무덤이 있고, 사진 뒷편에 지하 예배당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 예배당에는 19세기에 만든 성상이 있는데 가로 10m, 높이 6m 목판에 일일이 손으로 깎아 만든 공력이 돋보인다. 사진촬영을 금지해 찍지는 못했지만 이들이 자랑할만 한 작품이다.
마케도니아를 다녀온 다음 해 이 조용한 나라에 내전이 발생했다. 코소보사태가 조금 심각하게 돌아가더니 알바니아계 난민들이 국경을 넘어 마케도니아로 들어온 것이다. 알바니아의 세력확장을 우려한 마케도니아는 이들을 쫓아내기 시작했고 이는 내전으로 격화되었다. 항상 그렇지만 그런 일이 있고나면 많은 사람들이 떠오른다. 오흐리드에서 만났던 숙소아저씨와 아이들을 산책시키러 나온 할머니들, 스프라이트 한 캔으로 날 감동시킨 빵집 아저씨와 시장의 친절한 암달러상...이들 모두 무사하기를, 아무일 없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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