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은 조선왕조의 법궁이다. 그러나 법궁의 무거움이 주는 역사를 누린 것은 아주 잠시동안이었다. 태조 때 터를 잡고 지어졌으나 실제 애정을 가지고 기거하기 시작한 것은 세종때에 와서다. 그러다가 세조때 창덕궁에 법궁의 자리를 내어주고 명종 때에는 설상가상 근정전과 경회루 등 몇 채를 제외하고 불길에 전소되었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일어난 직후 완전 소실되었으며 고종때까지 허허벌판으로 버려져 있었다.
흥선대원군의 의지로 중건된 경복궁은 그러나 연이은 일제수탈로 만신창이가 되었다. 대부분의 전각이 박람회를 한다는 명목으로 헐려나가고 심지어 일본으로까지 팔려나갔다.
다행히 총독부 건물이 철거되고 1차에 걸친 경복궁 복원사업이 광화문 제모습 찾기와 함께 조만간 마무리된다.(그럼에도 지금 볼 수 있는 궁궐은 흥선대원군 시절의 40% 수준에 불과하다.)
1. 광화문-흥례문-근정전 영역
한양과 경복궁은 '주례고공기'라는 중국 사서를 따라 지어졌다. 전조후시(앞에 궁궐, 뒤에 시장), 좌묘우사(좌측에 종묘, 우측에 사직), 전조후침(궁궐은 앞에 업무공간, 뒤에 생활공간)이 그 원칙인데...이를 충실히 따른 중국의 자금성과는 달리 경복궁은 대체로 이를 융통성있게 적용하고 있다. 이는 허허벌판의 북경에 비해 서울엔 아름다운 북악산을 배경으로 한 풍수적 개념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조후시는 아예 무시되었고, 궁궐 내부도 광화문에서 흥례문-근정전-사정전-강녕전-교태전으로 이어지는 주축만 대칭이 되고 기타 나머지 공간들은 자유롭게 배치되었다.
<근정문에서 바라본 흥례문>
흥례문의 원래이름은 홍례문(弘禮門-예를 널리 편다)이었다 한다. 그런데 흥선대원군 시기 청나라 황제 건륭의 이름에 '홍'자가 들어가 있다하여 興禮門으로 바꾸었다 한다. 흥례문과 근정문 사이 금천이 흐르고 여기에 영제교가 놓여있다. 왕만이 건널 수 있는 이 다리는 속세와 임금의 공간을 구분짓는 역할을 한다. 신하들은 사진 오른쪽으로 나 있는 길을 통해 드나들었다.(이 길은 유화문을 통해 궐내각사, 즉, 지금의 대통령비서실로 연결된다.)
<근정전에서 바라본 근정문과 흥례문 영역>
근정문으로 출입할 수 있는 자는 임금 내외와 세자, 중국 칙사뿐이었다 한다. 신하들의 출입을 위해 근정문 좌우에 별도의 문을 냈는데, 우측(사진상 왼쪽)은 문관이, 좌측(사진상 오른쪽)은 무관이 드나들도록 하였다.
<회랑에서 바라본 근정전 영역>
이 곳은 매우 의식적인 공간이다. 권력의 정점이자 각종 경축행사와 의전이 벌어졌던 곳이다.
<근정전의 위용>
근정전 앞마당은 다듬지 않은 화강암을 깔아놓았다. 이는 여러가지를 배려한 것으로, 1. 매끈한 돌에 비해 미끄러짐이 적다. 2. 햇빛의 반사를 분산시켜 눈부심을 덜어준다. 그리고 3. 걸음을 신중히 걷도록 유도함으로써 자연스레 고개를 숙이게 만들어준다.
창건 초기 근정전의 기와는 사정전과 함께 원래 임금의 업무공간으로 청기와를 썼다고 한다.(지금의 청와대와 같이)......지금도 창덕궁에서 그 전례를 볼 수 있다.
마찬가지 문짝도 청색계통이다. 청색은 제후국의 왕을 상징하는 색이다.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과 순종황제가 살던 창덕궁(인정전)과 덕수궁(중화전)은 황제의 색인 황색을 사용하고 있다.
<근정전 앞의 품계석>
품계석은 동서 12개씩 모두 24개를 세웠다. 문반은 동쪽, 무반은 서쪽에 종렬로 섰는데 문무반 각 18품계를 가진 것에 비해 품계석이 12개가 부족한 셈이다.
2품계석 옆에는 바닥에 쇠고리가 설치되어 있다. 월대 1층과 근정전 기둥에 있는 쇠고리들을 연결해 차양을 쳤다고 한다. 따라서 차양은 고위관리들만 누릴 수 있었고 하급관리들은 행사가 있으면 뙤약볕 밑에서 무지 고생했으리라...예전이나 지금이나..에효~
<임금전용 답도에 조각된 봉황과 서수>
근정전에 올라가기 위해선 2단으로 된 월대를 올라서야 한다. 월대 중 임금이 지나가는 어도에는 봉황이 노니는 답도와 이를 지키는 양옆의 두마리 서수가 있다. 왕은 가마를 타고 다니므로 어도의 계단은 가마꾼들이 지나다니는 길이었지만, 혹 왕이 직접 걸을때에는 올라갈때 오른쪽, 내려갈때 왼쪽 계단을 사용했다 한다.
월대 주변에는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사신상과 십이지신상의 동물들이 조각되어 있다. 다만, 용은 건물내부 천장에 있으므로 제외되었고, 개와 돼지도 없다. 혹시 그 이유 아는 사람?
<동쪽의 청룡>
<남측의 말-오신상>
<역시 남측의 주작>
<뱀-사신상>
<월대의 향로>
향로는 임금이 행사에 도착하여 행사의 시작을 알리는 역할을 하였다. 천, 지, 인을 상징하는 세 개의 발이 땅을 상징하는 네모와 하늘을 상징하는 둥그런 주춧돌에 서 있다. 예전에는 향로의 뚜껑이 있었다고 하는데 일제시기 사라져버렸다.
<근정전 내부의 어좌>
<근정전 천장 중앙의 일곱개의 발톰을 지닌 황룡>
2. 사정전 영역
근정전 뒤를 돌면 주축상에 사정문이 있고 여기를 통과하면 직사각형의 공간이 나온다. 그 곳에 세 채의 건물이 있는데, 가운데 사정전이 있고 좌우에 천추전과 만춘전이 있다. 여기는 임금이 업무를 보는 공간(편전)으로 각종 회의 등이 열렸다. 사정전은 공식 업무시설로 마루만 깔려 있어 겨울에는 온돌이 깔려 있는 천추전과 만춘전에서 업무를 보기도 했다. 예전에는 이 세 건물이 복도로 연결되어 있었다고 한다.
<사정문에서 바라본 사정전>
사정전 앞 마당은 예전 사육신들과 조광조가 고초를 당한 곳이기도 하다. 사정전은 투명한 국정을 상징하고자 벽없이 기둥과 문으로만 구성되어 있다.
<사정전 내의 어좌와 운룡도>
운룡도는 구름속에 여의주를 희롱하는 쌍룡을 그린 것이다. 구름은 현명한 신하를 상징한다. 이 곳이 신하들과의 회의 장소라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사정전 앞 사정문 좌우 행각에 설치된 내탕고>
내탕고는 임금의 개인 보물창고로 사용되었다. 금, 비단 등을 비롯해 무기 등도 보관되었다. 곳간은 총 10개인데 서측 天字庫부터 동측 마지막 月字庫까지 천자문 순서(天地玄黃......)에 따라 붙어있다.
<사정전 서측의 천추전>
천추전은 세종이 집현전 학사들과 만나고 훈민정음 창제를 위해 고민하던 곳이다. 혼천의, 측우기, 자격루 등의 발명품이 첫 선을 보인 곳도 이 곳이다. 사정전 앞에는 앙부일구(해시계)가 설치되어 있다.
<사정전 동측의 만춘전>
천추전이 고종 중창시기 건물 그대로 보존된 데 비해 만춘전은 한국전쟁의 포화를 피해가지 못했다. 본 건물은 1988년 복원된 거라 한다.
천추전과 만춘전의 지붕 합각(팔작지붕에 보이는 삼각형 벽)에는 문양을 새겨넣었는데 문양의 중심에는 '강康'과 '녕寧'자를 집어넣었다. 사정전에 가까운 쪽에 '강'을, 먼쪽에 '녕'을 집어넣었으니, 사정전 앞에서 찍은 사진 속의 만춘전에는 '강'이 보이고 있다.
3. 강녕전-교태전-아미산 영역
<강녕전의 위용>
강녕전과 교태전의 임금내외의 생활공간(침전)이다. 강녕전이 민가의 사랑방이라면 교태전은 안채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건물은 용마루(지붕의 제일 높은 곳의 등뼈와 같은 중심요소)가 없다. 용이 같은 하늘 아래 두 마리가 될 수 없는 까닭이다.
강녕전 앞에도 월대가 있다. 그런데 이 곳의 월대는 근정전의 월대와 다르게 임금의 사적인 연희를 베풀기 위해 설치되었다. 왕실 가족잔치가 종종 벌어진 이 곳에선 궁녀들이 춤을 추고 악공들이 연주하는 장소로 활용되었다.
<강녕전 내부 동측 모습>
강녕전 대청마루 좌우에는 침소인 온돌방이 있다. 온돌방은 조그만 9개 방들로 다시 구획되나 문을 모두 트면 하나의 커다란 공간이 생긴다. 잘 때는 문을 닫아 7개의 방을 만들고 그 중 외부와 접하지 않은 가운데 방에 임금이 들었다. 임금 머리맡의 북측 방을 제외하고 각 방마다 상궁들이 하나씩 들어가 밤새 경호를 했다고 한다.
임금이 자는 곳인데도 왕비도 마음대로 들어올 수 없었다고 한다. 침소는 마음을 가다듬는 공간이므로 색도 멀리해야 한다는 까닭이다. 하지만 임금도 인간인데....결국 많은 왕의 자녀들이 후궁소생이다......(후궁소생으로 왕위에 오른 왕은 광해군, 인조, 경종, 영조, 순조 등이 있다.)
방에는 외국의 화려한 궁전처럼 번쩍거리는 세간살이가 없다. 모든게 흉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강녕전 뒤편 마당...오른쪽으로 나 있는 어도가 교태전으로 연결되어 있다.>
다양한 크기와 모양의 지붕이 겹쳐져 있는 모습이 참 보기 좋다.
사진에 시선방향으로 나 있는 문은 흠경각과 함원전이 있는 공간으로 통하는 문이다. 강녕전 일대의 공간구성은 다른 공간처럼 직사각형이 아니다. 크게 'L'자 모양을 하면서 교태전 공간을 감싸는 구조로 되어 있다. 'L'자 중 위로 삐죽 나와 있는 부분은 따라서 강녕전과 이어져 있고, 담을 사이로 교태전과도 연결된다. 사진상의 문이 바로 이 삐죽 나와 있는 부분과 연결된다.
<흠경각-장영실이 왕명으로 지은 건물>
'L'자형의 삐죽 나와 있는 공간에 있는 건물로 대표적인 게 흠경각이 있다. 세종 20년에 장영실이 지은 건물인데 여기에 그 유명한, 그러나 현재는 전하지 않는 옥루기륜(자동 물시계)이 있었다 한다. 만일 전래되었다면 정말 인류 최고의 발명품으로 선정될만한 가치가 있는 보물일 것이다.
흠경각은 임금의 침전인 강녕전과 별 관계가 없는, 그야말로 관리들이 근무하는 관청(각사)이다. 대부분의 각사들이 편전 바깥에 위치하고 있는 점을 고려할 때 획기적이다. 이는 그만큼 기후조건이나 시간을 관리하는 게 농경국가의 임금으로서 최고의 의무였음을 알 수 있다.
<함원전>
'L'자형의 제일 상부에 있는 건물로 흠경각과 쌍을 이루고 있는 건물이 함원전이다. 함원전은 세조 때 불상을 모신 내불당으로 사용되기도 하는 등 유난히 불교와 인연이 깊은 건물이다.
<함원전 후면의 우물과 후원>
흠경각 앞에도 우물이 있는데 함원전 뒤에도 우물이 있다. 함원전은 'L'자형의 강녕전 공간의 가장 상부에 있는 건물이므로 그 후원은 교태전의 아미산과 연계가 된다.
<함원전 후원에 있는 석물>
우물이 있는 후원에 앵두나무와 모란꽃 사이로 놓여진 석물이다. 거북모양의 동물이 또아리를 틀고 있는 2마리의 이무기를 이고 있는 형상인데 그 모습이 굉장히 섬세하다.
<양의문에서 바라본 교태전>
강녕전 뒤쪽 양의문은 남성과 여성의 공간을 구분하는 문이다. 여기를 넘어서면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이 있다. 당연히 양의문의 잠금장치는 강녕전이 아니라 교태전쪽에 달려 있다. 합궁의 의지는 임금이 아닌 왕비에게 있기 때문이다.(이는 다른 사대부 주택에서도 비슷하다.)
교태전은 생각보다 큰 건물이다. 원래 있던 교태전은 창덕궁 대조전을 짓기 위해 일제가 헐어냈지만, 다시 지어진 모습으로도 그 찬란한 위용을 확인할 수 있다. 거의 갇혀 지낸 왕비를 위해 매우 세심하고 화려하게 지어진 건물이다. 본채와 부속건물들이 모두 툇마루로 연결되어 있다. 왕비 주변의 궁녀들이 기거하는 방들은 신분에 따라 지붕의 높낮이가 달라 아기자기한 맛이 있다.
<교태전 마루에서 바라본 양의문과 강녕전>
<교태전에서 바라본 아미산>
<교태전의 후원, 아미산의 모습>
아미산은 경회루를 건설하면서 나온 흙을 쌓아 만들었다. 왕비 침전 후원으로 계단식 정원에는 사철 아름다운 꽃이 피어난다. 아미산을 넘어가면 후궁들의 거처들이 있는 흥복전 권역이 나오는데 지금은 빈 터로 남아 있다.
<아미산 뒷문으로 나오면 흥복전 권역이다.>
잔디로 덮힌 곳이 옛 건물 흔적이다.
4. 경회루 및 궐내각사 권역
<경회루 남측 전경>
아마 경복궁 내에서 가장 유명한 건물일 것이다. 경회루는 현재의 만원짜리 지폐 뒷면에 그려져 있다. 르꼬르뷔제가 필로티 건물이란 개념을 내기 이미 400년도 전에 만들어진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누각이다.
지금이야 사방팔방 다 트여 있지만 예전에는 높은 담으로 둘러쳐져 임금의 초대가 있어야만 들어갈 수 있는 특별공간이었다. 동측에 3개의 문이 있고 이 문에 3개의 다리가 걸려 있다. 그 중 제일 앞쪽 다리가 임금이 사용하는 어도이다. 처음 건설될 때에는 기둥마다 용트림 형상이 조각되어 있어 연못에 비친 경회루의 모습은 더 장엄했으리라.....
경회루 2층은 마루바닥이 3단으로 되어 있고 가장 가운데 자리가 임금이 앉는 높은 자리이다. 모두 주역과 불경에 기초해 설계되었다고 한다. 암튼 그 2층 제일 가운데 자리에 앉으면 천하가 나를 중심으로 펼쳐져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경회루는 단종이 수양대군(세조)을 조용히 불러 성삼문을 통해 옥새(왕위)를 넘겨준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또한 연산군 시절 채홍사들이 전국에서 불러들인 어여쁜 아낙네들과 희희낙낙하던 장소이기도 하다. 이 때 뽑힌 아낙네들을 '흥청'이라 이름붙이기도 했는데 후일 '흥청망청'이란 표현도 여기서 생겨났다고 한다.
<수정전 - 옛 집현전>
경회루 남측지역은 마치 경회루를 위한 정원처럼 나무들과 잔디밭이 펼쳐져 있다. 하지만 이 일대는 승정원 등 예전 관원들이 근무하던 궐내각사 권역이다. 한마디로 대통령비서실이 있던 자리다. 모든 건물들이 일제에 의해 헐리고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물이 바로 이 수정전이다. 과거 집현전이 있던 자리로 왕이 자주 드나들어 특이하게 관청건물로 월대가 건물앞에 있다.
갑오개혁 이후엔 김홍집 내각의 중심건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경회루에서 흥복전 영역으로 가는 길>
왼편이 경회루로 들어가는 문, 오른편이 이제까지 둘러봤던 편전, 침전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그 두 개의 공간 사이에는 이렇게 기다린 골목길이 나 있다. 끝부분에는 흥복전 영역으로 나갈 수 있는 문이 보인다......(Part 2에서 계속)
*** 본문에 사용된 지식은 '경복궁'(양택규 지음, 책과함께 출판사)이란 책자를 일부 참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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