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동궁 영역
동궁은 임금이 되기 전 왕세자가 기거하며 임금 수업을 받는 곳이다. 경복궁 주축(광화문-흥례문-근정전-사정전-강녕전-교태전)을 기준으로 볼 때 오른쪽(동쪽)에 위치하고 있다.(즉, 경회루의 반대쪽)
근정전 앞 마당에서 오른쪽에 나 있는 융문루를 통해서도 접근 가능한데 관리들은 경복궁의 동문인 건춘문을 통해 동궁전에 드나들었다. 서측의 영추문이 근래에 지어진 콘크리트 건물이나, 동측의 건춘문은 고종 중건 당시 그대로이다. 이 문을 들어서면 왕실가족들의 공간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는데 지금은 커다란 은행나무 한 그루만 말없이 역사를 지키며 그늘을 제공하고 있다.
<경복궁 안쪽에서 바라본 건춘문의 위용>
사실 동궁전은 일제시기 모두 헐려나갔다. 크게 자선당(내당-침전)과 비현각(외당-집무실)이 나란히 놓여 있고 그 남측으로 동궁의 업무를 지원하는 여러 시설들(내관처소, 수라간, 경호, 서고 등)이 있었다.
<동궁전 영역>
현재는 자선당과 비현각만 복원이 되어 있고(사진의 건물들) 남측의 시설물들은 사진에서와 같이 텅 빈 잔듸밭으로 남아 있다.
<자선당 - 왕세자 및 왕세자비의 침전>
자선당은 왕세자와 왕세자비가 잠을 자는 사적공간이다. 여기서 문종은 28년, 정종은 24년간 왕세자로 자리를 지켰다. 순종이 아관파천으로 여기를 떠난 후부터 비게 되었고, 일제는 강점 초기 건물을 해체해 일본으로 밀반출해갔다. 동경 오쿠라 호텔에서 굴욕의 세월을 보내던 자선당은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완전히 소실되었고, 그 유구석은 방치되다가 지난 90년대말 다시 경복궁으로 돌아왔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당시 동경제국호텔 설계를 위해 일본에 머물던 근대 4대 건축거장 중 한 명인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R. Wright)가 자선당 해체에 참여한 오쿠라의 초청으로 '코리안룸'의 온돌을 최초로 경험하고 충격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현재 그 '코리안룸'은 자선당이 아니었을까 추정되고 있다.
<자선당 침전 내부 - 왼쪽이 왕세자비, 오른쪽이 왕세자>
<자선당과 비현각 사이에 있는 칙소(변소)>
물론 이 변소는 왕궁의 내시나 궁녀들, 관원들이 이용했을 것이다. 왕은 일종의 좌변식 변기를 사용했다고 하는데, 일을 마치면 뒤처리 전담 궁중나인이 명주수건으로 뒷마무리를 해주었다고 한다.....임금은 아무나 할 수 있는게 아닌 거 같다.....정말 프라이버시라곤 없다....사랑도, 용변도 모두 다른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해야하니...쩝~......참고로 궁중용어인 梅花(매화)는 대변, 梅雨(매우)는 소변이라고 한다.
<비현각 위용>
비현각은 세자가 교육을 받고 정무를 펴던 곳이다. 세자들은 태교부터 교육을 받아 임금으로서의 교양과 자질을 훈련받는다. 그러나 비극인 것은 그렇게 길러진 세자 중 왕위에 오른 사람이 몇 안된다는 것이다.
세자였으나 왕위에 오르지 못한 사람은 양녕대군(태종의 장남, 폐세자), 소현세자(인조의 장남, 의문사), 사도세자(영조의 장남, 당파싸움에 뒤주에서 굶어죽음) 등 11명이다. 반면, 비세자 출신으로 왕위에 오른 사람은 모두 27명의 임금 중 태종, 세종, 영조, 정조, 고종 등을 비롯해 15명에 이른다.
비현각도 최근에 복원한 건물인데 일제시대에 헐려 나간 행적조차 아직까지 묘연하다.
<비현각 내부 - 왼쪽이 공부방, 오른쪽이 집무실....>
<소주방 터.....수랏간 터이다.>
소주방은 수랏간이다. 동궁과 북측 자경전 사이에 있는 공터가 바로 그 공간인데 복원될 예정이라 한다. 장금이가 좋아하겠군...
6. 자경전 영역
자경전은 대비가 거처하던 곳이다. 지금의 자경전은 흥선대원군이 만든 그대로로 보물809호이다. 헌종의 어머니 신정왕후가 고종의 왕위 등극을 도와준 것에 대한 답례로 궁 안에서 가장 멋지고 화려하게 지었다고 한다.
<자경전의 멋진 위용>
자경전은 같은 여자 공간인 교태전에 비해 단순하면서도 위엄이 느껴진다. 오밀조밀한 맛은 없지만 강직하고 기품이 서려있다.
<자경전 입구의 두꺼비>
아마 무병장수를 상징하는 게 아니었을까?
<자경전 뒤뜰 굴뚝>
멋진 십장생이 부조되어 있는 벽은 사실 인근 연도를 모두 하나로 합쳐놓은 굴뚝이다.
<자경전 서측의 꽃담>
추상과 구상의 절묘한 조화란 이런 게 아닐까.....화려하나 사치스럽지 않고 섬세하나 명쾌한 이 문양은 아라베스크 못지 않다고 단언할 수 있다.
6. 흥복전 영역
교태전과 자경전 북쪽 영역은 흥복전 영역이다. 흥복전은 과거 후궁의 선임자가 거처하던 빈궁이었다. 일제가 이 구역을 모두 헐어내면서 여기에 일본식 정원을 설치하는 바람에 유구조차 확인하기 힘들정도로 파괴가 되었다 한다.
<풍기대>
풍기대는 바람의 방향과 세기를 측정하기 위해 깃대를 꽂아두던 기구였다. 관청이나 궁궐마다 있었다 하나, 남아 있는 것은 경복궁과 창경궁의 딱 2점 뿐이다.
<함화당과 집경당>
흥복전 영역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물들이다. 이 건물을 넘어서면 바로 향원정이다.
그러나 이 건물들의 용도에 대해선 명확하지 않다. 흥복전에 딸린 침당으로 추정되나 고종이 간혹 외교사신을 접견했다는 기록만 있을 뿐 자세한 역사를 알 길이 없다.
일제가 명성황후 시해와 고종의 아관파천 이후 향원정 북측의 건천궁을 헐어 총독부미술관 별관을 건설하면서 이 건물들을 미술관 관리사무소로 사용한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한다. 참 나라 망하니 별 꼴을 다 본다.
<장고>
장고는 높은 담으로 둘러싸여 바깥에선 잘 보이지 않는다.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이 곳은 장독대를 놓은 공간이다. 근처 높은 바위위에 올라가 찍으니 장독 몇 개가 겨우 보인다.
7. 건천궁과 향원정 영역
건천궁은 경복궁의 제일 북쪽에 위치한 별궁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별궁에 딸린 향원정은 왕족들의 사적인 휴식공간이다.
<향원정의 남측전경>
향원정은 6각형의 평면으로 1층은 온돌방, 2층은 마루로 되어 있다. 문을 모두 열면 주변의 풍경이 액자에 담기듯 들어온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 느낌을 공유할 수 없어 안타깝다. 출입이 금지되니 오히려 정자가 하나의 오브제가 되어 감상의 대상이 되버린 것은 분명 재고해봐야 할 일이다.
<향원정의 수원지, 열상진원>
향원지의 북서쪽에 자리잡은 이 지하수는 경복궁 창건당시부터 왕궁의 음용수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연못에 파문이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 물이 바로 연못에 떨어지지 않고 돌을 다듬어 수면 아래로 흘러가는 구조로 되어 있다.
<향원정의 북측 전경>
사진은 건천궁 쪽에서 바라본 것이다. 지금은 향원정을 건너는 다리(취향교)가 남측에 걸려있지만 과거에는 건천궁에서 건널 수 있도록 북측에 무지개다리로 걸려있었다고 한다. 사진에 보면 돌을 쌓아 일부 담처럼 보이는 것이 바로 다리를 걸었던 기단이다.
<건천궁 입구>
향원정 북측에 녹산을 끼고 자리잡은 건천궁은 단청이 없이, 마치 사대부의 주택을 옮겨놓은 듯한 모습으로 서있다. 건천궁은 우리에겐 가슴아픈 장소로도 각인되어 있다. 바로 여기서 명성황후가 일본 깡패들의 칼에 최후를 맞이한 곳이기 때문이다.
<건천궁 내 장안당>
건천궁 입구에 들어서면 먼저 사각형의 대기공간이 나타난다. 여기서 왼쪽의 초양문으로 나가면 사랑채라 할 수 있는 장안당이 나온다. 명성황후를 시해하러 온 일본 깡패들은 여기서 잠이 덜 깬 고종과 순종에 생명의 위협을 가하며 불손한 짓을 저질렀을 것이다.
<건천궁 내 곤녕합 옥호루>
대기공간에서 직진하면 안채에 해당하는 곤녕합이 나온다. 그 중에서도 누마루로 되어 있는 옥호루가 바로 명성황후가 치욕을 당한 곳이기도 하다. 을미사변 직후 고종은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건천궁을 탈출해 러시아공사관으로 파천하게 된다.(아관파천) 이후 빈 집이 된 건천궁을 일제는 자신들의 만행을 지우기 위해 아주 깨끗이 헐어버리게 된다.
<건천궁의 서측담>
건천궁을 나와 왼쪽에 향원정을 끼고 집옥재 방향으로 가다보면 경복궁 담장에 뚫려 있는 문이 보인다. 예전 청와대 자리는 경복궁의 후원이었고 저 문은 후원으로 나가는 길이었을 것이다.
8. 집옥재 영역
집옥재는 여러모로 특이한 건물이다. 당초 창덕궁에 지어진 것을 고종이 경복궁에 다시 옮긴 것으로 주로 외국 사신 접대 등에 사용되었다 한다. 그런데 그 모양도 독특해 얼핏 보면 중국 건물과 같다.
<집옥재 정면 모습>
집옥재는 좌측에 역시 중국풍의 2층 정자인 팔우정, 우측에 협길당을 두고 복도로 이를 연결하고 있다. 집옥재는 도서관 역할을 하기도 했다.
<집옥재를 옆에서 본 모습>
<집옥재의 뒷모습>
<뒷부분에 있는 창호>
옆면이 벽돌로 처리된 것도 이채롭고 원형의 창호도 이국적이다. 처마에 유려한 곡선미도 없는 모습이 경복궁 내 건물 중 이질적인 느낌으로 다가온다.
9. 태원전 영역
여기는 과거 대통령경호부대가 주둔하던 자리다. 물론 출입금지였고 사람들은 향원정까지만 들어올 수 있었다.
태원전은 돌아가신 임금의 신위가 종묘로 가기 전 3년 동안 보관되던 장소이다. 또한 장례가 이루어진 한마디로 '죽은 자의 공간'인 셈이다.
<태원전으로 들어가는 입구>
이 곳은 상당히 외진 곳에 자리잡고 있어 찾아오는 사람이 드문 탓에 매우 을씨년스럽다.
<태원전 영역의 숙문당>
<경복궁의 북문, 신무문>
태원전과 집옥재 사이에 신무문이 있다. 신무문은 곧장 청와대 본관을 향해 열려있다. 과거 청와대는 경복궁의 후원이었으며 아직도 그 자취가 곳곳에 남아 있다.
우리나라 곳곳의 어디가 안 그렇겠냐만은 경복궁에 얽힌 비화와 역사를 공부하다보니 돌멩이 하나, 풀 한포기가 예사로이 보이지 않는다. 사람은 공간을 만들어냈지만, 공간은 또 역사를 만드는 법이다. 그 역사를 알 지 못하고 공간을 둘러보는 것은 그래서, 아무 의미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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