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 여행, 문화]/건축이야기

건축이야기(16)-건축공간의 비밀(3) : 건축과 시각

budsmile 2008. 7. 5. 14:23

건축은 연극, 회화, 무용에 이어 흔히 제4의 예술이라고들 한다. 이밖에 문학, 음악, 영화, 사진, 만화등 지금까지 총 아홉 개의 예술 장르가 분류되고 있는데 이들을 크게 분류하면 움직임이 있는 ‘리듬예술’(음악, 무용 등)과 움직임이 없는 ‘조형예술’(회화, 사진 등)로 나눌 수 있다. 그럼 건축은 어디에 속하는 예술일까?

 

건축이 예술이 될 수 있는 건 무한한 창조가 가능한 ‘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모양과 크기를 어떻게 할 것인지, 창문은 어디에 어떤 모양으로 어떻게 뚫을 것인지, 색과 재료는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장식은 무엇을 사용할 것이며 각 공간은 어떻게 배치할 것인지 그 건축물의 기능과 상징성과 자리잡은 위치와 지역적 특성 및 건축주의 요구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결정하게 된다. 거기에는 무한한 경우의 수가 나오게 되고 이들을 배열하고 조합하는 과정에서 황금분할, 대칭, 균형과 같은 조화나 비례 요소들이 나오게 된다. 결국 물리적인 건축을 미적인 가치로 환원시키는 것은 조화나 비례를 감지할 수 있는 인간의 시각적 요인으로부터이다.

 

무엇을 시각적으로 아름답다고 느끼게 되느냐하는 것은 오래된 미학의 논제였다. 세상을 질료(物자체)와 표상으로 나누고 선험적 인륜성의 상징으로서 미를 추구하는 칸트는 플라톤에서부터 이어져온 오래된 형이상학의 논제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선악구분의 이분법적 도덕에 근거한 전통 형이상학은 고정된 관점에서의 중심성을 거부하며 예술을 삶의 적극적 의지의 표현으로 간주하는 니체(Nietzsche)와, 심지어는 '우리가 존재하기 이전에 이미 존재하는 고귀한 도덕적 가치'를 비웃듯 오직 '성적 불만'으로 가득찬 무의식이란 어처구니없는 놈이 현실을 지배한다는 프로이트(Freud)에 의해 철저히 농락당한다.

 

19세기말 이러한 사상체계의 혁명적인 변화는 우리의 시각적 취향까지 변화시켰다. 사실 그 전까지 건축과 회화는 절대자의 시각에서만 존재했다. 르네상스시기 투시도의 발견은 ‘1인칭 시점’의 절정이었다. 화면에는 그것이 담고자 하는 모든 것이 원근법적 질서에 따라 배열되었다. 건축물 역시 건축가가 지정하는 가장 중요한 장소에 섰을 때만이 가장 아름다운 시각적 풍경을 제공하게 된다. 인간의 고정된 시각-사실 변함없는 절대자의 시각-은 십자형 성당의 교차부분이 만나는 곳에서 성당내부를 가장 아름답게 한 눈에 굽어볼 수 있는데-그 자리엔 예외없이 못박힌 그리스도의 상이 존재한다- 그러한 장소를 가장 손쉽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이 ‘대칭’이었다.

 

그러나 중심성이 사라지자 모든 것은 ‘신의 눈’에서 ‘사람의 눈’으로 재해석되기 시작하였다. 나뭇잎은 작열하는 햇살아래서 더 이상 푸른색이 아닌 황금빛으로 표현되고 있었다. 인상파들의 시도는 여전히 고정된 시각에서 작성된 것이었지만 표상에 대한 자유로운 관념을 나타내고 있다. 나는 스페인 화가 벨라스케스(Velazques)의 ‘시녀들’이란 파격적인 그림을 이러한 운동의 시작으로 보고싶다. 여기서 그림을 보고 있는 것은 화가(즉, 절대자)가 아닌 거울에 비친 황제부부이다. 내부공간은 투시도에서 볼 수 있는 완벽한 공간이 아니며 화면 뒷부분 빛이 들어오는 밝은 부분이 표현하듯 또다른 공간을 암시하면서 그 경계의 문을 넘을 듯 말 듯 서있는 사람이 그려져 있는 등 미스테리한  디테일로 가득찼다. 게다가 등장인물들까지 원근감을 방해하는 듯 일렬로 늘어서있다. 나의 시점과 화면의 시점이 다른 두가지 시각의 공존, 공간의 연속성, 의도적으로 어긋난 화면 등장인물들의 시선과 배치는 바야흐로 입체파와 초현실주의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라 할 만하다. 피카소(Picasso)와 달리(Dali)가 이 그림을 수도없이 변형하여 그린 습작을 남긴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회화에 벨라스케스가 있다면 건축엔 에펠탑이 있었다. 프랑스대혁명 100주년을 기념하는 파리 만국박람회를 기념하여 세워진 이 거대한 탑이 유명한 것은 단지 철이라는 이색적인 재료가 표현하는 곡선의 아름다움에 있지 않다. 사람들은 에펠탑에 설치된 나선계단을 오르내리면서 새로운 충격적 경험을 했던 것이다. 내가 움직이면 세상은 시시각각으로 달라 보이기 시작한다. 파노라마처럼 한눈에 펼쳐진 이제까지의 익숙한 일방향 풍경대신 조각난 사진을 모자이크하듯 동서남북 사방의 풍경이 내 시야속으로 한꺼번에 접속되기 시작한다. 입체파화가 들로네(Delaunay)가 그린 '에펠탑'은 이러한 시각적 충격을 담아낸 그림이다.

 

<에펠탑과 들로네가 그린 에펠탑>

 

이제 시각은 가만히 고정되어 있질 못한다. 모더니즘시기로 오면서 인간의 운동에 기초한 새로운 시각적 아름다움의 추구는 다양한 공간을 만들어내었다. 그리고 비로소 건축물은 공간으로 해석이 가능해졌다. 기둥과 계단등 각각의 건축요소들은 사람들이 걸어가는 방향에서 갖가지 의미를 내포하며 적절히 배치되어 순간순간의 공간을 창출해나간다. 건축가가 치밀하게 짜놓은 순서대로 사람들은 이동하면서 매순간 새로운 공간을 맛보게하던 모더니즘의 일방향 건축공간(르꼬르뷔제는 이를 '건축적산책'이라 부른다)은 2차 세계대전이후 더욱더 적극적인 다방향공간으로 바뀌었다. 한 공간속에 존재하는 여러 사람들의 다양한 시각이 모두 존중되는 이른바 민주주의의 시대이자 해체의 시대가 온 것이다.


전남 담양에는 '소쇄원'이라는 정원이 있다. 중국이나 일본과는 확실히 차별화된 우리식 정원의 가장 위대한 표본인 이 곳은 마을초입 계곡입구에 만들어졌다. 경사진 비탈길과 구불구불한 계곡의 자연환경을 그대로 살리며 건축물과 담장, 정자등의 인공요소는 극히 절제되어 표현된다. 먼저 마을로 향해 난 조그만 길을 따라 걷다보면 나도 모르게 소쇄원에 들어가있음을 알게 된다. 대문이 따로 없기 때문이다. 일단 들어선 정원에는 광풍각이라는 가장 중요한 오브제로서의 정자가 눈에 띄는데 내가 그곳에 이르는 길을 건축주가 따로 정해놓지는 않았다. 발길 닿는대로 계곡을 가로지르는 외나무다리를 지나든, 밑으로 내려가 계곡을 건너든 상관없다. 각각의 길은 나름대로의 풍경을 선사하며 이 조그만 정원을 굉장히 풍요롭게 만들어준다. 여기까지라면 현대 해체주의의 앞선 시각적 감각에 뒤질 게 없다. 소쇄원에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다른 감각까지 고려한 그 무언가가 있다. 주변의 대나무밭이 부드럽게 지나가는 바람에 간지러운 듯 칭얼대며 사각대는 소리는 계곡의 물소리와 어울려 살아있는 듯 꿈틀거리는 정원을 만들고 사시사철 피어나는 정원의 꽃들이 뿜어대는 알싸한 내음은 일순간 정신을 아찔하게 한다. 여기서야말로 건축은 시시각각 변하는 시간속에서 나의 움직임과 일체화된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소쇄원의 중심공간, 광풍각>

 

건축이라는 예술 장르는 회화처럼 누구의 간섭없이 자기 스스로 완벽한 아름다움을 갖는 완결된 예술도 아니며, 무용처럼 열심히 뭔가를 보여주며 관객들에게 가만히 앉아 아름다움을 단지 감상할 것을 요구하는 예술도 아니다. 그것은 건축이 사람들의 삶속에서 만들어지고 향유되어지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건축공간속에서 움직이며 살고 그 공간을 자신만의 공간으로 끊임없이 각색하며 여기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나간다. 이것이 건축을 리듬예술과 조형예술의 경계를 뛰어넘는 종합적인 통합예술이라 부르는 이유일 것이다. (2005.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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