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 여행, 문화]/건축이야기

건축이야기(18)-건축공간의 비밀(5) : 건축과 상대공간

budsmile 2008. 7. 5. 16:23

1. 5년전 인도차이나반도를 도보로 횡단할 때다. 아직 기반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곳을 육로로 이동하는 것은 거의 미친 짓이나 다름없었다. 그 날도 그랬다. 나는 베트남의 옛 수도이자 분단의 아픔이 서린 도시 후에(Hue)에서 산악지대를 가로질러 라오스의 사바나켓(Savannakhet)까지 이동할 생각이었다. 그동안 제대로 된 버스라곤 타본 적 없던 터였지만, 이번엔 뭔가 다르리라 느꼈다. 이름도 거창한 국제버스......그리고 어설프지만 조그만 전용 대합실과 번듯한 승차권까지......이제야 제대로 된 버스를 타볼 수 있으리라 내심 기대했다. 그러나 버스는 예정된 시간 저녁 10시를 훌쩍 넘기고서도 깜깜 무소식이었다.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배는 고프기 시작했다. 할 수 없이 라면을 꺼내어 근처 식당주인에게 요리를 부탁했다. 냄새가 맛있었는지 아니면 신기했는지 먹고 있는 모습을 빤히 쳐다보는 주인에게 라면 하나를 건넸고, 덕분에 안락의자까지 갖춘 주인의 방에서 나는 버스가 올 때까지 추위를 피할 수 있었다.


새벽 1시 30분 드디어 버스가 도착했다는 고함소리에 놀라 뛰쳐나가보니, 헉....정말 국제버스(?)가 와 있었다! 월미도같은 한글 정류장이름이 선명히 적힌 외관은 분명 인천시내버스다. 하루에 한 대 오는 그 버스를 어떻게든 타기 위해 나는 사람들 사이를 뚫고 버스안에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이미 버스안은 어디서부턴가 타고온 사람들로 가득했고 내부에는 곡식을 가득 담은 가마니를 바닥에 깔아놓아 제대로 걷기조차 힘들었다. 어두운 곳에서 엉금엉금 기어가며 겨우 더듬거린 끝에 자리에 앉았다. 결국 기다린 사람의 반이상이 탑승을 포기한 채 버스는 출발했다. 긴장이 풀리니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지만 오히려 그건 고통의 시작이었다. 개조된 버스내부의 의자는 쿠션이라곤 전혀 없이 정확히 90도 각도로 놓여져 있었다. 엉덩이를 뒤에 붙이고 직각으로 앉아도 무릎이 앞좌석에 닿을 정도로 간격까지 비좁아 나는 몸을 비틀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좌석밑 발치에 놓인 가마니위에 어중간하게 올려진 다리와 꼿꼿이 세워진 허리가 서로 다른 각도로 꼬여져 앉아 있는 모양은 마치 요가를 방불케 했다. 의자 등받이는 어깨정도 높이로 머리를 기댈 수조차 없어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내내 나는 본의 아니게 머리를 쉴새없이 허공에 돌릴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버스 차체는 양옆이 바닥과 벌어져있어 그 사이로 쉴새 없이 뿌연 흙먼지가 쏟아져 들어왔고 버스가 휘청거릴 때마다 현지인들이 가지고 탄 닭들은 중심을 잡느라 날개를 펼치고 비명을 질러댔다. 아픈 엉덩이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온갖 포즈를 취하던 나는 날이 밝아 주위를 둘러볼 수 있게 되자 깜짝 놀랐다. 그것은 두 사람밖에 앉을 수 없는 그토록 불편한 자리에 현지인들은 세사람, 심한 곳은 네 사람이 앉아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150km도 안되는 거리를 16시간 동안 달리면서 내가 본 것은 불평 한마디없이 오히려 행복하게 웃고 있는 그네들의 얼굴이었다. 오히려 독일인 배낭객과 단 둘이 앉았음에도 좁고 불편한 공간에 괴로워하는 내 자신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모든 공간에 대한 평가는 상대적인 것이다!!!


2. 남미 볼리비아(Bolivia)에는 경상북도 크기만한 소금사막(Salar de Uyuni)이 있다. 말 그대로 모래대신 소금이 굳어 이루어진 사막이다. 가도가도 온통 하얗게 펼쳐진 사막은 그러나 마치 호수처럼 군데군데 무릎까지 닿을 정도의 물로 덮여 있었다. 깨질 듯 새파란 하늘에 구름은 3천 미터가 넘는 고도로 인해 모두 내 눈높이, 지평선 부근에 띠를 두르듯 피어오른다. 지평선 부근 구름은 물에 반사되어 하늘과 땅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어버리는데 거기에다 강렬한 태양이 만들어내는 뿌연 소금안개는 이러한 몽환적 분위기를 자극한다. 원근감을 상실해버리는 공간속에서 기존의 거리감각으로 단련된 나의 고정관념은 모두 소용이 없었다.

 

<우기때의 우유니 소금사막의 모습>

 

소금사막을 벗어나 황량한 사막을 4일간 트랙킹하면서 나는 기이한 경험을 계속했다. 사막 여기저기 불쑥불쑥 솟아있는 산들은 마치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이지만 반나절 이상 차를 타고서야 가까스로 그 밑에 도달할 수 있었고 높이는 한걸음에라도 달려올라갈 수 있을 것같이 낮게 보였지만 모두 해발 6∼7천 미터급 고봉들이었다. 고도가 높은 탓에 나무가 전혀 없어 거리와 높이를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벌어진 순전한 착시현상이었다. 우리나라에서 보는 산은 나무가 울창해 입체적이고 구름은 머리위에서 있어 한 면밖에 볼 수 없는 평면이지만, 그곳 사막의 산은 오히려 나무나 그림자가 없어, 마치 저멀리 커다란 걸개그림이 하나 걸린 듯 보이는 2차원 평면이고 구름은 내 눈높이에서 부풀려진 3차원 입체였던 것이다. 내가 가진 감각과 지식이란 것이 얼마나 편협한 것이었던가......그리고 그것을 마치 절대불변의 진리인양 믿고 있는 게 얼마나 우스운가......또 내가 경험하지 못한 진실이 얼마나 무궁무진 할 것인가.....모든게 뒤죽박죽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우유니사막의 붉은산과 붉은 호수, 그리고 솜사탕같은 구름들>

 

3. 공간이 가진 상대적인 성질을 잘 이용한 건축물이 바로 타지마할(Taj Mahal)이다. 무굴제국시기 비운의 황제 샤자한이 아내를 위해 건축한 기념비적 무덤으로서 유명한 곳이다. 타지마할의 기본틀은 직육면체에 돔을 얹어놓은 모양으로 그 건축적 형태는 단순하다. 그러나 일단 직육면체의 양옆을 약간 뒤쪽으로 휘어 평면적인 딱딱함을 입체적인 볼륨감으로 바꿔놓고 있다.(이는 서울역앞 경사진 대지에 위치한 거대한 힐튼호텔과 비슷한 형태개념이다.) 그리고 주변에 놓인 4개의 탑은 원근감을 이용해 건축물 전후의 공간을 시각적으로 확장시키고 있으며, 주입구에 길게 놓인 수로에 비친 타지마할은 건축물을 상하로 확장시키고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주변에 이 건축물의 크기를 가늠할 만한 어떠한 비교대상도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흰 대리석의 추상적인 느낌은 원근감과 크기 개념을 더욱 더 약화시킨다. 이렇게 탄생한 타지마할은 실제로 보면 사진으로 봤을 때보다 훨씬 더 크게 느껴진다. 인도정부는 그 주변에 전망좋은 호텔을 지어 돈을 버는 대신 그러한 경관을 보존하기 위해 특별법으로 타지마할 주변의 어떠한 개발도 허용하지 않고 있다.

 

<타지마할>

 

4. 좁은 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공간의 상대성을 극대화시킨 또 하나의 예는 티벳의 수도, 라사(Lhasa)의 포탈라궁(Potala Palace)이다. 과거 달라이라마의 겨울궁전인 이 곳은 라사 어디에서도 볼 수 있을 만큼 시내 한가운데 높이 솟아 있다. 중국의 침공과 문화대혁명시기 티벳의 많은 사원들이 홍위병들에 의해 파괴되었지만 주은래는 자신의 군대를 보내 이 궁전의 파괴만은 막았을 정도로 참 아름다운 곳이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서있는 하얀 궁전은 돌과 나무로 만들어 바깥에 회칠을 한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산꼭대기에 13층의 단일 건축물이 서있는 거 같지만, 실상 내부로 들어가서 보면 여러 채의 건물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형국이며 그 중 가장 높은 것도 9층에 불과하다. 산이 많은 티벳의 건축은 경사진 지형을 이용해 건축물을 여러 동 짓되, 이를 시각적으로 겹치도록 하는 것이 특징이다. 건축물크기와 지형의 상대적 크기를 잘 이용한 덕분에 입구에서 보면 하나의 거대한 건축물로 보이는 위용을 얻을 수 있었다.

 

<티벳 라사의 포탈라궁>

 

5. 중국에 갔다 온 사람들 중에는 경복궁을 자금성과 비교하는 말을 가끔 한다. 그 중에는 스케일에 있어서 경복궁이 보잘 것 없다는 말까지도 서슴지 않는다. 그러나 근정전이 태화전보다 작은 것은 그만한 기술이 없어서가 아니다. 그것은 도시 한복판 넓은 대지에 건설된 자금성이 스스로 인공적인 환경을 갖추기 위해 거대하게 건설된 것과 달리 경복궁은 북악산이라는 자연지형을 이용해 이를 시각적 경관에 끌어들인 결과였다. 즉, 북악산의 거대한 크기를 인간적인 스케일로 낮추기 위해 그것과 상대적으로 비교가 되는 공간, 즉 경복궁의 크기가 결정되었던 것이다. 오히려 경관측면에서 경복궁을 망치고 있는 것은 근정전의 크기가 아니라, 경복궁을 위압적으로 내려다보며 우뚝 서 있는 정부종합청사이다. 비교불가능한 크기의 19층(84m) 건축물은 상대적으로 경복궁을 한없이 초라하게 만들고 왕복 16차선의 세종로는 광화문의 위엄을 반감시켰다. 

 

<근정전과 근정전을 배후에서 받치고 있는 북악산>

 
6. 주어진 공간의 품격수준을 결정하는 데에 건축물 자체의 아름다움도 중요하지만 그 공간주변의 상대적 비교대상에 대한 우리의 사려깊은 접근에도 많은 책임이 있지 않을까? 만일 그러하다면 그것은 도시의 모든 건축물들이 공공성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200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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