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서 배낭여행을 하다보면 당혹스러울 때가 가끔 생긴다. 그 날도 그랬다. 새벽녘 기차간에서 속이 불편하다 싶더니 마르세이유 역에 내렸을 때 상황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어 있었다. 나는 정신없이 화장실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그러나 새벽 다섯시. 역사내의 모든 화장실은 모두 굳게 닫혀 있었다. 역장실에 가서 사정을 해보고 경찰서에서 애원을 해봐도 소용없었다. 그러나 찾는 자에게 길은 있는 법. 정차된 기차간의 후미진 공간은 나에게 구원의 안식처를 제공해주었고, 나는 그 날 국민학교 시절 냄새나는 숙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문지 위에 쭈그려 앉아 있던 어릴 적 기억을 떠올렸다.
화장실은 항상 어둡고 은밀한 공간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었다. 거대한 바닥에 칸막이라고는 전혀 없이 구멍만 숭숭 뚫린 중국의 화장실을 처음 본 순간 난 변비가 걸리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로 이용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하지만 급하니까 별 수 없다. 그리고 새로운 공간을 경험했다. 누군가와 인사를 나누면서 일을 볼 수 있는 화장실은 나에게 더 이상 조용하지도 부끄럽지도 않은 공간이 된 것이다. 인도에서는 한 술 더 뜬다. 어슴푸레한 새벽녘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기찻길변 풀숲으로 쏟아져 나온다. 아무렇지도 않게 자리를 잡고 바지를 내린다. 처음엔 그런 그들이 지저분하고 야만스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매년 우기때 허리춤까지 차는 홍수로 인해 집안에 설치한 화장실이 전염병의 온상으로 변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것은 그네들이 처한 환경에 대한 생존방식임을 알게 되었다. 다른 사람의 살아가는 방식을 내 가치기준에 맞춰 평가할 수는 없는 법이다.
<중국의 한 화장실>
포카리스웨트 CF에 나온 적이 있는 하얀 회칠과 둥근 볼트형 지붕이 아름다운 그리스 에게해의 집들은 단순히 관광객을 위하여 혹은 아름다운 건축을 만들기 위한 의도적인 노력으로 나온 게 아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녹여버릴 듯한 열풍과 따가운 햇빛을 최소한으로 받기 위한 나름대로의 생존방식이다. 이렇듯 각자가 처한 자연적 환경은 그것에 적응하며 살아야 하는 사람들의 주거환경과 건축물디자인까지 변화시킨다. 그러나 혹독한 자연환경이 건축과 피동적인 관계로만 구성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 산토리니섬의 하얀마을, 이아시>
요르단에는 '페트라(Petra)'가 있다. 이름은 생소하지만 인디아나존스 3편에서 마지막 장면에 해리슨포드가 성배를 찾아 들어간 신전으로 나와 유명해진 유적이다. 그러나 영화에 나온 신전은 사실 무덤으로서 절벽을 파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 페트라 유적은 이 일대 계곡에 산재하는 신전, 무덤, 경기장 등 광범위한 유적군을 일컫는 말이다. 얼마나 험하고 넓은지 3일짜리 입장권을 끊고 매일매일 산을 몇 번씩이나 오르내렸지만 몇 개의 유적은 보는 걸 포기해야만 했다. 페트라 유적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영화에서처럼 협곡을 지나야 한다. 붉은색 사암으로 이루어진 60m 절벽이 세 사람정도가 겨우 같이 걸어갈 수 있을 정도의 협곡을 무려 1.5km이상 만들고 있다. 풍화가 된 사암은 아름다운 무늬를 그리고 있고 깊은 협곡은 한낮에도 약간 어두컴컴할 정도다. 고요한 정적을 깨며 협곡을 지나가는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협곡사이로 스며드는 절제된 햇빛을 따라 걸어가노라면 종교적 엄숙함마저 들 정도다. 그 협곡이 끝나는 부분에서 또하나의 거대한 절벽과 정면으로 맞닥뜨리게 되는데 바로 그 절벽에 새겨진 것이 영화에서 본 신전이다. 그런데 이 신전은 정남향이어서 낮이 되면 눈이 부실정도로 반짝반짝 빛난다. 어두운 협곡을 걸어오다보면 저 멀리 반짝거리는 신전이 조금씩 협곡의 틈사이로 드러나며 묘한 감동을 준다. 그리고 협곡을 빠져나오는 순간 마치 빛나는 보석처럼 장엄한 신전의 아름다움에 온 몸이 마비되어 버린다. 척박한 자연환경은 인간의 손에 의해 건축의 몸을 빌어 새로운 창조를 가능케하는 것이다.
<페트라- 협곡의 끝에서 보는 신전, 바위에 조각된 신전 전경>
자연환경의 재해석을 통한 인간의 놀라운 창조력은 부석사에서도 볼 수 있다. 경북 영주 소백산줄기에 놓인 부석사는 우리에게 무량수전으로 너무 유명하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더 경이로운 것은 공간에 대한 해석능력이다. 필로티로 띄어진 범종루의 어두운 바닥밑에서 슬쩍 보이는 안양루와 무량수전의 밝은 풍경은 입구에서부터 시작된 전체적인 축을 자연스럽게 꺾으면서 참배자들을 경내로 인도한다. 다시 안양루를 지나 무량수전앞에 이르러 뒤를 돌아다보는 순간 '아∼'하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소백산맥의 준령들이 마치 동양화를 그리듯 아스라이 펼쳐진 무한의 파노라마를 보노라면 절대적인 대칭축을 흐트려 가면서까지 부석사가 가지려고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깨닫게 된다. 바로 이것을 얻기 위해 법당들은 잘 짜여진 각본에 맞춰 그 위치에 놓여지게 된 것이다.
<부석사에서 바라보는 소백산맥 원경>
건축물은 자신이 놓이게 될 그 자리가 갖는 독특한 자연환경을 통해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낸다. 자연환경의 혹독함과 아름다움은 새로운 건축공간을 만들어내기 위한 창조적 모티브를 제공해준다. 그것이 건축을 논의함에 있어 자연환경을 빼놓을 수 없는 이유다. 부석사를 똑같은 형태로 서울도심에 옮겨놓는다면 그것은 사람들에게 어떠한 감동을 줄 수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멋진 한옥들을 땅에서 떼내어 만든 남산한옥마을은 더 이상 건축물이라 부를 수 없을 것이다. 그건 오히려 키치와 오브제들로 가득찬 놀이동산과 같다. '땅'과 '장소'는 스스로가 '건축공간'을 품고 있으며, 우리는 그 공간을 물리적인 '건축물'로 형상화할 뿐인 것이다. (2004.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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