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는 지상과 분명 다르다. 지상에서 통하는 방향감각과 시간개념은 어둡고 습한 지하세계에서는 전혀 통하지 않는다. 이로 인해 지하공간에는 지상의 질서를 저항하는 상징적 인식체계가 형성된다. 이는 오랫동안 신화의 주된 테마이기도 하였다. 미노타우루스가 사는 미노스의 지하미로에서 그려진 인간의 상상력은 만화 <미래소년코난>을 비롯하여 <데몰리션맨>, <인디아나존스>, <바이올린플레이어>, <오페라의유령>, <해리포터>와 같은 영화들에 아이디어를 제공해주었다.
아무리 단순하다 하여도 지하공간에선 계단을 몇 바퀴 돌고나면 우리의 공간인지능력은 철저히 유린당하기 십상이다. 따라서 지하공간에서는 지상과는 다른 '길찾기(way-finding)'가 필요하게 된다.
1. 남미의 유일한 내륙국 볼리비아(Bolivia)는 과거 스페인식민시절 은의 중요한 생산지였다. 그 남부에 있는 광산도시 '포토시(Potosi)'에 가면 지금도 그 때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지금은 더 이상 은이 나오지 않아 쇠락해 버린 이 도시의 첫인상은 마침 추적추적 내리는 비로인해 슬퍼보이기까지 한다. 낡은 집들과 비포장 도로, 여기저기서 남루한 옷차림의 인디오들로 가득찬 이 도시를 감싸주고 있는 것은 '세로리코(부유한 산)'라는 산이다. 마치 마티스의 그림에서나 나올 법한 나무 하나 없는 이 붉은 사화산에는 아직도 엘도라도를 찾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여기저기 지하로 난 구멍이 뻥뻥 뚫려져 있다.
<포토시에 있는 붉은산 '세로리코'>
광부들에게 줄 다이너마이트와 꼬까잎을 시장에서 샀다. 꼬까는 마약 코카인을 만드는 나뭇잎이나 이 곳 사람들은 말린 잎을 간식처럼 씹어 먹는 걸 흔히 볼 수 있는데, 고산병에도 효험이 있어 난 자주 다른 배낭객들과 노천카페에서 꼬까차를 즐겨했다. 산 중턱의 광산입구에서 장화와 옷을 빌려입고 석유로 밝힌 호롱불하나를 들고 지하세계로 들어갔다. 이 곳의 동굴들은 가족단위로 운영된다. 다시말해, 일가족이 근처에 집을 짓고 살며 하루종일 은을 찾아 수작업으로 땅을 파헤치고 있다. 막상 지하로 들어가자 입구부분을 제외하고는 길이 제대로 나있지도 않아 쪼그리고 앉아서 가슴을 무릎에 대고서야 다닐 정도로 높이와 폭이 좁다. 게다가 주위에서는 연신 터지는 다이너마이트 소리에 땅이 흔들리고, 해발 5천미터 가까이 되는 탓에 희박한 공기로 숨까지 턱턱 막힌다. 막장까지 내려가 다시 올라오기까지 2시간여, 폐쇄공포증이라도 있었다면 아마 심장이 터져 죽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지하에서의 길찾기는 일방향만으로 해결될 수도 있다. 환경이 아무리 열악하고 복잡해도 한 방향으로만 계속 진행하면 언젠가는 출구가 나오리라는 희망이 있다. 그러나 길들이 점점 분화가 되면서 여러 갈래가 생기기 시작하면 문제는 달라진다. 가장 단순하게는 표지판을 설치하고 동선을 규제할 수밖에 없다. 로마근교의 '카타콤베'는 원래 지하묘지였던 곳을 박해를 피해 모여든 기독교인들에 의해 미로가 되어버린 곳이다. 아직까지 그 정확한 규모와 구조를 알지 못하는 까닭에 지금도 출입금지구역을 넘어선 무모한 관광객들의 실종사건이 심심찮게 보도되기도 한다. 여기서 정해진 길을 따라 표지판을 확인하는 것은 목숨을 지키는 것과도 같다.
<카타콤베>
2. 폴란드의 옛수도, 크라코우(Krakow)는 도시자체가 고풍스러운 중세모습을 고이 간직하고 있는 조용한 곳이다. 이 곳을 찾는 사람들은 반드시 근교의 두 명소를 방문하게 된다. 하나는 그 유명한 나찌 수용소, '아우슈비츠'이고 또 하나는 '비엘리츠카(Wieliczka) 소금광산'이다. 이 광산은 말 그대로 소금을 캐던 광산으로서, 지하 100미터 가까이 계단을 타고 내려가면 지하세계가 눈앞에 펼쳐진다. 그런데 볼리비아에서 보던 지하공간과는 그 인상이 무척이나 다르다. 일단은 공간 자체가 크고 널찍해서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깊이 들어갈수록 만나게 되는 공간들이 각각 특징을 가지며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동굴안에는 호수도 있고, 요양소도 있으며 식당과 길이 54m의 채플까지 갖추고 있다. 길을 걷다보면 이 크고 작은 공간들은 서로 중첩되면서 나의 위치를 매순간 확인할 수 있도록 해준다. 조그만 휴식공간을 지나나싶더니 어느덧 전체 공간을 내려다볼 수 있는 예배당 2층에 올라 지나온 길을 내려다보고, 지하2층, 3층으로 내려가는 듯하나 지하를 관통하는 넓은 공간이 곧 나타나 전체 공간의 모습을 유추할 수 있도록 해준다.
<비엘리츠카 소금광산 내 호수와 채플>
3. 우리가 아는 서울의 지하세계는 볼리비아의 그것과도 같다. 지하철 노선이 하나둘씩 늘어나면서 생긴 환승역은 말 그대로 미로다. 표지판이 없으면 지하철을 갈아탈 수도 없고 비상시 어디로 피난해야 할지 감도 잡지 못한다.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고 만들어진 코엑스몰은 역시 일방향 미로이지만 각 구역별로 디자인과 색상, 인테리어등을 특색화하여 자신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조금 더 생각하면 '동일성의 법칙'을 이용할 수도 있다. 즉, 비슷한 위치엔 같은 기능의 공간을 배치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느 역에서건 열차 제일 마지막 칸에 있는 계단은 지상으로 바로 통하도록 하여 이용자들에게 무의식적인 교육을 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일방향 미로가 갖는 '길찾기'의 근본적인 한계는 여전하다.
모스크바의 지하철은 전쟁을 대비해서 만들었는지 입구의 에스컬레이터 끝에 서면 반대편 끝이 보이질 않는다. 그만큼 깊게 내려가지만 전혀 답답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 전체 플랫폼과 매표소를 관망할 수 있는 시원한 공간이 주는 인상은, 우리네 지하철처럼 플랫폼에 내렸을 때 어딘가를 향해있는 계단 몇 개가 주는 막연한 불안감과는 확연히 다르다. 그래서일까? 표지판에 영어라곤 한 마디도 쓰여있지 않은 지하철을 나는 너무도 편하게 이용하고 다녔다.
<모스크바 지하철 입구>
지하공간에서 최상의 길찾기는 과연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너무나 어려운 문제지만, 내 경험상 생각해 볼 수 있는 건 벽과 천장으로 사방이 꽉 막혀 '지시통제'로 규율하기보다는 어느 정도 시각적으로 개방되어 전체 공간을 관조할 수 있도록 하는 '공간설계 해법'으로 접근하는 것도 한 번 고려해볼 만 하지 않을까 싶다. (200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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