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을 보면 중세시대 수도원의 모습이 잘 그려지고 있다. 일반인의 접근을 쉽게 허용하지 않는 산봉우리에 위치한 수도원은 그 자체가 하나의 도시였다. 자급자족적 생활을 영위하는 수사들이 각각의 역할분담을 통해 다양한 용도의 공간을 만들어냈다. 덕분에 지금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학교, 도서관, 병원, 교도소등의 개념이 바로 여기서 형성되었는데, 이러한 고풍스런 수도원 몇 군데를 운좋게 방문한 적이 있다. 불가리아 소피아 인근의 릴라수도원(Rila Monastery),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몬세라트수도원(Monserrat Monastery), 페루 아레키파의 산타카타리나 수도원(The Convent of Santa Catalina)등이 특히 인상에 남는다. 그 중에서도 이탈리아 아시시의 성프란체스코수도원(San Francesco Monastery) 은 조그맣지만 참 아름다운 곳이다.
<릴라 수도원, 몬세라트 수도원, 산타카타리나 수도원>
성 프란체스코는 13세기 청빈·겸손·헌신등을 내세우며 프란체스코회를 설립한 카톨릭의 성인이다. 그 프란체스코가 태어난 아시시에 프란체스코 수도원이 있고 여기엔 그의 무덤과 지오토등 유명한 화가들의 프레스코화가 많이 남아있다. 지난 97년 여행을 갔다온지 한달만에 발생한 지진으로 많은 피해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 때 이 프레스코화들은 원형을 잃어버렸다. 안타까운 일이다.
아시시(Assisi)는 로마에서 페루자로 가는 도중에 위치한 작은 도시이다. 역에 내리면 저 멀리 산 하나가 보이고, 그 산의 중턱부터 꼭대기까지 온통 건축물이 뒤덮고있다. 그러나 고층건물 대신 산의 높이에 따라 배치된 적당한 크기의 건축물들은 서로 조화를 이루며 도시전체를 하나의 피라미드처럼 보이게 만든다. 버스를 타고 요새같은 이 도시의 성벽안으로 들어서면 고풍스런 자태를 풍기며 가파른 경사지에 모여앉은 돌로 만들어진 주택들 사이로 역시 돌이 깔아진 골목길들이 미로처럼 얽혀있다.
<아시시 전경>
처음엔 좀 당황스러웠다. 배산임수, 즉 산은 도시형성을 위하여 주변형국을 구성하는 요소로서 이는 바람, 물의 흐름, 일조등을 결정한다는 우리의 풍수 지리와는 달리, 자연환경이 열악한 산 정상 가까운 곳에 도시가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시내중심가에 미네르바 신전이 있는 것으로 보아 로마시대부터 형성된 이 도시는 사실 상업도시이다. 수많은 도시국가들간의 전쟁과 지배속에서 자신들의 부를 지키기 위해 그들은 산을 삶의 터전으로 선택했던 것이다. 사람들의 삶은 이처럼 자연보다 더 억척스러울 수도 있다.
아무튼 그 덕분에 아시시는 골목길로 유명한 도시가 되었다. 경사지에 도시가 있다보니, 집들이 놓여있는 방법도 제각각이 되고 길에서 집으로의 진입 형식도 변화무쌍하다. 골목길로부터 계단으로 때로는 완만한 램프로 이어지는 집으로의 진입은 집앞에서 작은 테라스를 만들기도 하고, 자신의 프라이버시를 지키기 위한 여러 가지 재치있는 장치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아예 자신의 집 정원등 일부를 밖으로 빼내 다른 사람들과 시각적으로 공유하기도 하고 아름다운 담을 만들기도 한다. 경사지 주택이 그렇듯 출입구는 높이에 따라 2-3개씩 생기게 되고 이로 인해 주택내부는 엇층(1.5층같은)이나 중층의 메조넷(내부위치에 따라 2층이 되기도 하고 3층이 되기도 하는)이 형성된다. 이러한 골목길은 매순간 작지만 전혀 다른 공간을 만들어주어 도시를 도보로 순례하는 여행객들에게 풍성한 볼거리를 제공해주고 있는 것이다.
<아시시 골목길>
산위의 도시가 주는 매력은 그런 인간적인 아기자기함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건축에 대한 여러 가지 실험과 상상력을 제공해주는 데 있다. 이와 같은 골목길은 자동차가 다닐 수 없으므로 온전히 보행자의 차지가 된다. 특히 아이들에겐 더없는 공간이다. 우리에게도 그런 기억이 남아 있지 않았던가?
그리스 산토리니섬(Santorini) 또는 모로코 탕제르(Tanger)나 튀니지 튀니스(Tunis) 등 아랍지역의 '메디나'라 불리는 구시가에서 볼 수 있는 매력적인 골목길을 우리나라의 달동네에서도 볼 수 있었다. 개발되기 전의 난곡이나 봉천동에 있던 달동네들은 아시시 못지 않은 변화무쌍한 골목길의 풍경을 간직하고 있었다. 돈많이 들인 개발계획도 없었지만 주민들이 만든 골목길은 유명한 건축가의 도시계획 못지 않았다. 난 아시시의 다양한 골목길 풍경을 이들 달동네에서도 발견하고 감탄했지만, 몇 년 후 이들 골목길은 깨끗하고 직선화된 아스팔트 포장길로 바뀌었다. 그리고 아이들과 보행자를 몰아내면서 차가 내달리고 분수에 맞지 않은 고층아파트들이 멋없게 늘어선 공간으로 정리되었다. 고지대의 고층아파트들은 경관과 스카이라인을 완전히 망치는 도시의 흉물이기도 하거니와, 높은 곳을 편하게 올라가려는 차들로 교통혼잡과 공해가 가중되었다.
<산중턱에 지어진 고층아파트들>
예전과 똑같은 거리의 길이었지만, 걸은지 채 5분도 안되어 느껴지는 지루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들이 현대화의 상징인지는 모르겠으나 보행자에겐 그리 유쾌한 공간은 아닌 것이다. 어느덧 우리에게도 산위의 도시는 낯익은 풍경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 꼭대기까지 자동차가 드나들도록 반듯하게 놓여진 길에 대해서도 무감각해졌다. 그러는 사이 경사지가 갖는 독특한 공간적 특성을 살리지 못하고 도시전체의 경관으로서나 그곳에 실지로 거주하는 주민들에게 불편한 공간이 되어버렸다. 경사지를 절개하여 고층아파트를 세우는 것이 과연 효과적인 개발방식일까? 꼬불꼬불한 골목길은 근대화를 위해 반드시 정리되어야만 하는 도로일까? 단지 그 골목길을 보기 위해 전세계로부터 모여드는 아시시의 수많은 관광객과 건축가들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2004.6.28)
'[건축, 여행, 문화] > 건축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건축이야기(12)-지하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0) | 2008.07.04 |
---|---|
건축이야기(11)-세계의도시(4) (0) | 2008.07.04 |
건축이야기(9)-세계의도시(2) (0) | 2008.07.03 |
건축이야기(8)-세계의 도시(1) (0) | 2008.07.03 |
건축이야기(7)-Less is more! (0) | 2008.07.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