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의 북서쪽, 분쟁지역으로 잘 알려진 캐쉬미르와 접하고 있는 곳이 펀잡이다. 지금의 펀잡은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나뉘면서, 이슬람을 믿는 서펀잡은 라호르(Lahore)를 주도로 파키스탄에 편입되었으며, 시크교를 믿는 동펀잡은 찬디가르(Chandigarh)를 주도로 인도에 편입되었다. 다시말해 종교로 인해 단일민족이 분단되어 살고 있는 것이다. 파키스탄(Pakistan)은 각 주의 이니셜을 모아 국명으로 사용한 나라인데, 제일 첫머리의 P가 바로 펀잡(Punjab)을 가르킨다. 우리는 흔히 인도인하면 머리에 터번을 두르고 턱수염이 덥수룩한 모습을 그리지만, 사실 터번은 시크교도들만의 상징이다. 시크교도는 힌두교가 대다수를 차지하는 인도사회에서 불과 2%에 불과하지만 교육열이 높아 상류층이 많고 소를 숭배하지 않아 고기를 즐겨먹은 탓에 체격이 건장하다.
시크교는 이슬람의 유일신사상과 힌두교의 윤회사상이 결합된 종교이다. 모든 허식적인 제례와 사제제도, 카스트등을 거부하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열린 종교라 할 수 있다. 도보로 파키스탄 국경을 넘어 다시 버스를 타고 1시간도 채 걸리지 않아 도착한 암리차르(Amritsar)에 이 시크교의 총본산인 황금사원이 있다. 과거 분리독립운동으로 인해 피로 얼룩진 그 곳은 순례객들과 여행자들을 위한 무료 숙식시설을 운영할 정도로 개방적이다. 그 개방성은 사원의 건축적 형태에서도 엿볼 수 있다. 장방형의 성스런 호수 한 가운데에는 금으로 된 사원건물이 떠 있고 그 곳까지는 다리로 연결이 되어 있다. 호수 주변에는 빙 둘러 회랑이 있는데, 사방 어디서건 접근이 가능할 수 있도록 별도의 입구가 아예 없다. 새벽녘 신발을 벗어 발을 씻고 회랑에 들어서면 물안개와 함께 경전을 읽는 소리가 사원내에 가득하다. 영혼을 달래고 싶은 자들은 어느 누구나 들어와서 이 호수를 한 바퀴 돌아 사원을 참배할 수 있다.
<인도 펀잡주도 암리차르의 황금사원>
다른 종교의 사원들도 마찬가지이다. 힌두교의 칼리사원에서, 이슬람의 모스크에서 난 그들과 같이 기도에 참여하고 휴식을 취하거나 얘기를 나누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유럽에서 여행을 하다 지치면 근처 성당을 찾아 더위를 식히고 티벳사원에선 오체투지를 하며 지친 마음을 달랬다. 이처럼 누구에게나 접근이 가능하도록 설계된 열린 건축물들은 한 도시가 갖는 계급과 갈등의 소란스러움을 덮어주는 넉넉함을 보여준다. 공공건물이 말 그대로 공공성을 가지고 있다면 당연한 것이 아닌가? 그러한 공공성이 왜 우리의 도시에선 낯설기만 한 것일까?
도시의 역사는 공(共)적인 공간과 사(私)적인 공간의 끊임없는 분화에 있다. 길, 광장, 녹지와 같은 공적 공간을 주택과 같은 사적공간이 점유해 나가면서 도시는 그 팽팽한 긴장의 균형을 맞추어나간다. 여기에 공적공간과 사적공간이 부딪치는 곳(공간)이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되는데, 서양인들은 이를 '준(準)공적 공간'으로 파악한다. 그래서 집이나 상점이 도로와 만나는 곳에는 노천카페나 잘 꾸며진 정원을 두어 바깥의 공공성을 부드럽게 포용하는 완충지대를 형성해나간다. 심지어 도로에 면한 건축물의 정면 벽체를 '파사드(facade)'라 부르며 이를 아름답게 설계하는 것이 한때는 건축의 전부로 생각하던 때도 있었다. 지금도 파리등지에서 옛 건물을 리모델링할 때 파사드는 그대로 원형보존토록 하는 것은 그러한 인식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경우는 한 술 더 뜬다. 교토나 나라같은 古都의 좁은 주택가 골목길에는 마주보고 서 있는 건축물 사이에 반투명 유리천장을 걸쳐서 외부공간을 마치 실내공간처럼 바꿔 버렸다. 하늘은 보이나 비를 맞지 않아도 되는 이 외부공간은 툭 터진 다른 외부공간과는 분명 다른 느낌으로 도로와 주택사이를 매개한다. 비오는 날 사람들은 좁은 골목길에서 우산을 부딪치며 다니거나 흙탕물을 피해 비틀거릴 필요도 없다. 자신의 집 바깥으로까지 확장된 이 실내화된 외부공간은 '준(準) 공적공간'의 극치이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는 이 공간을 '준(準) 사적공간'으로 파악한다. 생각해보면, 그 전통은 꽤나 오래되었다. 한 마을의 제일 중심공간인 사대부 저택들은 바깥과의 완충공간인 사랑방을 대문안쪽에 두어 이 곳이 자신의 사적공간임을 명확히 나타내는 대신, 도로와의 경계는 높다란 담을 두어 매정하게 단절시켜버린다. 사랑방을 담 없이 바깥으로 빼내어 연못과 함께 마을사람들에게 개방한 성리학의 거두, 윤증선생의 충남 논산 고택이 내가 아는 '준(準) 공적공간'의 유일한 예다.
지금은 어떨까? 길에 접한 건축물 전면에 조그마한 공간이라도 생기게 되면 여기에는 어김없이 주차장을 두는 통에 보행자길까지 겁없이 올라온 차들로 공적공간의 보행자들은 때론 생명까지 위협받는다. 게다가 에어컨 실외기들은 그 보행자들을 향해 자신의 집 내부의 더운 공기와 음식냄새를 사정없이 뿜어대기까지 한다. 아름다운 파사드 대신 저마다 돋보이려는 원색적인 간판들로 건물벽은 도배되고, 건축물의 발코니에는 예쁜 화분대신 온갖 지저분한 살림살이들이 집집마다 도로를 향해 흉한 모습으로 쌓여져 있다.
<윤증고택의 바깥으로 튀어나온 사랑채>
사적 공간은 내 마음대로 사용해도 된다는 생각과 관청, 종교시설등 공공성조차 지켜지지 않는 수많은 공공건물들, 게다가 공적 공간은 사적공간의 만족을 위해서는 아무렇게나 상처내는데 익숙한 모습들 속에서 이제는 사적인 공간일지라도 발코니, 파사드등에는 '준(準) 공공'의 개념을 도입하는 것이 필요할 때가 되지 않았나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단지 우리들 마음의 여유가 없다고 치부하기엔 소유와 욕망의 흠집들로 꽉 차버린 우리의 도시가 안쓰러울 뿐이다. (2004.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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