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 좋던 10월의 가을날......홍천에 가족여행갔다가 다시 집으로 오는 길에 화창한 날씨를 외면할 수 없어 긴급 일정 변경하고 부랴부랴 차를 댄 곳이 바로 구리의 동구릉......동구릉은 말 그대로 서울의 동쪽에 있는 아홉기의 릉이란 뜻이다. 아홉기의 릉은 태조, 문종, 선조, 현종, 영조, 헌종의 여섯분의 왕과 추존왕 문조(헌종의 아버지인 효명세자), 인조왕비와 경종왕비를 이른다.
날씨가 좋아서일까? 주차장에 차를 대는 것부터가 일이었다. 그래도 재수좋게 얼마 기다리지 않아 자리가 났다. 근처 국수집에서 애들과 간단히 요기를 한 뒤, 산책하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릉 깊숙히 발을 들여본다. 나무가 울창한게 마치 숲속 오솔길을 걷는 듯....이내 홍살문이 이 곳의 범상치 않은 기운을 살짝 드러내보인다.
홍살문을 지나 조금 걷자 재실이 나온다.
재실을 지나 조금 안쪽으로 더 들어가자 드디어 첫번째 왕릉이 모습을 드러낸다. 추존왕 문조의 수릉이다. 순조 30년 효명세자가 승하하고 이후 헌종이 즉위하자 효명세자를 익종으로 추존하여 여기에 모셨다고 한다. 이렇게 왕으로 즉위하지 못하고 돌아가신 세자로서 나중에 추존된 왕은 조선시대 통틀어 5명이 있다. 성종의 아버지 덕종(의경세자), 인조의 아버지 원종(정원군), 정조의 양부와 생부였던 진종(효장세자)과 장조(사도세자), 그리고 여기 익종이 그 분들이다. 홍살문에서 릉까지 일직선으로 조성되어 있는데, 릉은 황후와의 합장릉이다.
그 다음에 만난 왕릉은 5대 왕 문종의 현릉이다. 세종대왕의 아들로서 한글창제 등 무수한 업적을 옆에서 도운 문종은 실상 왕의 재위기간이 3년밖에 이르지 않는다. 이 왕릉은 홍살문이 정자각과 일직선으로 있지 않고 직각으로 꺾어져 들어가도록 되어 있다. 규칙을 따르되, 지형에 순응하는 융통성을 보여주는 감각......
그런데 자세히보면 릉이 2개다. 정자각은 그 2개의 릉 가운데 정확히 위치해있다. 문종의 비 현덕왕후는 단종을 낳고 몸이 쇠약해져 문종보다 11년 먼저 24살의 나이로 요절하고 만다. 세조시절 단종 복위사건으로 인해 추폐되어 서민이 되었다가 중종대에 가서야 복권이 되었는데, 그제서야 문종 곁에 묻힐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까지 72년이 걸렸다. 전설에는 이 두개의 릉 사이에 원래 송림이 빽빽했었다고 하는데, 저절로 말라죽어 2개의 릉이 서로 마주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사실이건 아니건 문종과 단종의 아픈 가족사를 보는 듯하다.
현릉을 지나 조금 더 올라가자 길이 두 갈래로 나눠진다. 오른쪽 오솔길을 따라 가면 선조의 목릉이 나오고, 직진하면 바로 오늘 우리가 찾았던 태조의 건원릉이 자리한다. 태조의 건원릉은 아무래도 조선의 첫 임금이었던 만큼 후대 왕묘의 모범이 된 릉이다. 전체적으로 고려의 공민왕릉을 따랐다고 하나, 릉 뒤편에 나즈막한 담인 곡장을 두르는 등 약간의 변화도 있었다.
릉의 공간구성은 크게 능침공간과 제향공간으로 구분된다. 야트막한 언덕위의 성역공간인 능침공간이 있고, 그 아래로 정자각과 제의를 준비하는 수복방, 그리고 신도비가 있는 비각이 제향공간을 구성하고 있다. 능침공간은 통상시 외부인 접근금지이나, 미리 예약하면 올라갈 수 있다.
정자각은 여느 왕릉과 다를 바 없는 구조를 하고 있는데, 특이한 것은 그 안의 집기들이 모두 황금색이다. 대한제국시절 황제국이 되면서 태조가 황제로 추숭되면서 일어난 변화다. 그리고 신도비는 공적을 기록한 비석인데, 문종이 금지하면서 현재 남아있는 신도비는 건원릉과 태종의 헌릉뿐이라고 한다.
사진 왼쪽으로 보이는 숲길을 따라 올라가면 능침영역에 다다른다. 생각보다 봉분이 크다. 능 아래 병풍석을 두르고 호석을 세운 다음, 그 앞쪽에는 단을 두어 제일 윗단인 상계에는 혼유석과 망주석을, 중계에는 문인석과 석인 한 쌍, 그리고 장명등을, 제일 아래쪽 하계에는 무인석과 석마 한 쌍을 두었다.
곡장 뒤에 올라 저 멀리 건원릉의 향을 음미해본다. 왼편의 아파트가 조금 거슬리긴 하나, 참 명당이라는 기운이 저절로 느껴지는 곳이다.
릉 가까이 다가가 병풍석과 호석을 보다. 구조를 보니, 밑에서 건성으로 보던 것과는 달리 돌을 이리저리 짜맞춰 하나의 완결된 디자인을 구성해놓았다.
병풍석에는 12지신을 나타내는 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500년도 더 된 세월이 흘렀지만, 그 섬세함은 여전하다. 이걸보니, 갑자기 청계천이 떠올랐다. 태종은 당시 계비였던 신덕왕후와 함께 정릉에 묻히기를 원했다고 하는데, 나중에 신덕왕후를 죽도록 미워했던 태종이 신덕왕후의 릉을 도성바깥으로 이장하면서 첩으로 격하시켰고, 왕후의 릉에 쓰였던 병풍석도 청계천 광통교를 만들 때 일부러 사용했다고 한다. 지금도 광통교에 가보면 비슷한 병풍석들이 자재로 쓰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왕릉 주변의 석물들......하마같기도 하고 개구리같기도 한 이 석물은 호랑이......석호와 석양이 좌우 각각 4개씩 번갈아가며 바깥을 향해 앉아 있다.
중계의 영역에 서 있는 문인상......중계와 하계로 나눠 각각 문인과 무인을 배치한 것만 보더라도 조선 초기에는 문인을 우대했던 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구분은 조선 후기 헌종의 경릉을 조성할 때부터 없어졌다.
하계에 위치한 무인상......
장명등은 실제 불을 밝히던 석등이라기보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더 강하다.
혼유석은 혼이 앉아서 쉴 수 있도록 만든 편평한 자리를 말한다. 건원릉의 혼유석에는 도깨비 얼굴이 새겨진 북모양의 다리 4개가 혼유석을 지지하고 있다.
능침영역에서 바라본 제향영역......
이렇게 엄격한 규범과 질서로 왕릉의 권위를 다잡았지만, 정작 릉은 잔디대신 억새풀로 약간 지저분한 모습이다. 고향인 함흥을 그리워했던 태조를 위해 태종이 함흥의 흙과 억새로 봉분을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조선왕릉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500년을 이어진 왕조도 드물거니와, 그 왕조의 모든 왕들의 무덤이 이렇게 잘 보전된 사례도 없다는 점이 참작된 것이다. 조선왕릉은 그러한 역사적 의의 뿐만 아니라, 도심내 녹색공간으로서 그 역할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보물이 우리 곁에 영원히 남아 있도록 잘 보전해야 할 것같다....
건원릉을 보는 재미에 푹 빠지다보니 벌써 해가 뉘엿뉘엿해질 시간이다. 언젠가 다시 한 번 애들과 함께 와서 나머지 왕릉들도 둘러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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