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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절(8) - 순천 선암사

budsmile 2012. 8. 28. 18:40

<승선교에서 바라본 강선루의 모습.....이젠 선암사의 랜드마크로 자리잡은 풍경이다>

 

순천 선암사......영남에 부석사가 있다면, 호남엔 선암사가 있다. 남도의 구석에 자리한 이 산사는 특이한 내력과 건축학적 랜드스케이프로 유명하다. 유홍준교수가 한글, 백자와 함께 우리나라 대표 문화유산 셋 가운데 하나로 꼽은 산사의 전형으로 소개하였으며, 한국건축 전공자인 김봉렬교수는 우리나라 제일 좋은 절로 주저없이 대답할 수 있는 절이라 칭하기도 하였다. 도대체 어떤 아름다움이 숨겨져 있기에 이런 극찬들이 쏟아지고 있는 것일까?

 

선암사가 위치한 곳은 순천 조계산이다. 조계산에는 또 하나의 명찰, 승보사찰로 유명한 송광사가 있다. 그러나 그 이력은 맞붙은 거리만큼 가깝지 않다. 선암사는 고구려의 아도화상 또는 신라말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나, 크게 중창이 일어난 것은 대각국사 의천에 의해서다. 모두가 알다시피 의천은 교종의 입장에서 선종을 통합하려는 교관겸수를 주장하며 천태종을 창건했던 스님이다. 그가 개성에 올라가기 직전 머물렀던 곳이 바로 선암사에 자리한 암자, 대각암이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불교계파간 대립으로 빛을 보지 못하였는데, 고려말 보조국사 지눌이 선종입장에서 교종을 통합하려는 정혜쌍수를 주장하며 다시 한 번 교단의 통합을 추진했다. 그리고 그가 창건한 절이 송광사이고, 조계종인 것이다.

 

<선암사 진입로를 걷다보면 마주하게 되는 석주>

 

선암사의 복잡한 이력은 현대사에 와서 더욱 두드러진다. 일제가 한일불교통합을 위해 만든 원종에 반대해 송광사에 모여 한국불교의 법통을 고수했던 세력들은 해방 후 '조선불교'를 출범시켰다. 헌데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이 불교계를 정화하겠다며 대처승(결혼한 승려)을 모두 사찰에서 내쫓는 유시를 내리면서 분란이 시작되었다.(사실 이는 불교계 내부의 문제라기보다는 사사오입 개헌 직후의 위기탈출을 위한 정치적 깜짝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대처승들은 선암사에 다시 모여 반기를 들었고, 이에 비구승들과 분규가 빚어졌으나 결국 화해하지 못한 채 조계종(비구승)과 태고종(대처승)으로 종단이 나뉘게 된 것이다.

 

아직도 선암사의 소유권은 조계종, 점유권은 태고종으로 되어 있으며, 따라서 현재의 재산관리권은 순천시장에 위탁되어 있다고 한다.(작년에 두 종단간 합의로 재산관리권을 공동 인수키로 합의하기도 했다) 어쨋든 내력이 복잡하다보니 이 아담한 산사는 그 흔한 중창불사 한 번 없이 조선후기 지어진 양식과 배치 그대로 이어져내려올 수 있었다. 인간들의 분규가 빚어낸 아이러니한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선암사 진입로의 승탑밭......시기별로 다양한데 모양이 다들 개성넘친다>

 

선암사로 올라가는 진입로는 완만하다. 고즈넉한 비포장길을 따라 계곡의 물소리를 들으며 2km 정도를 올라가야 하는데, 중간중간 석주도 있고 승탑밭도 있어 지루하지 않다. 그리고 이전과는 달리 경사가 급해졌다고 느낄때 즈음 눈앞에 홀연히 나타나는 것이 바로 승선교와 강선루이다. 승선교(보물 400호)의 완벽한 반원호는 물에 비쳐 정확히 원을 구성하고, 그 안에 강선루가 들어오도록 구성되어 있다. 지금은 승선교를 왼쪽으로 지나쳐 일주문까지 곧장 올라가는 신작로가 뚫려 있지만 원래는 'ㄷ'자 형태로 계곡을 가로질러 2개의 승선교를 지나도록 되어 있던 길이다. 계곡에 바짝 붙여 지은 강선루 역시 자연을 오감으로 느끼면서 극적인 느낌을 받도록 루 아래를 통과해야 제맛이다.

 

<강선루의 위용, 안타깝게도 올라가서 감상할 수는 없었다>

 

강선루를 지나 급한 경사를 타고 삼인당 연못을 휘감아 돌면 일주문이 나타난다. 그것도 진입로의 축을 약간 비튼 얼짱각도로 말이다. 부끄러운듯 얼굴을 돌려 내미는 모습은 이 절이 일반인들에게 그리 개방적이지 않다는 의미일 것이다. 일주문에 붙어있는 짧은 담장이 앙증맞지만, 처음에는 시각적 착시로 인해 길게 이어져 보인다.(이 절의 특징은 그 무시무시한 사천왕상이 없다는 것이다. 대신 일주문 옆 파란 수국이 정겹게 우리를 반긴다)

 

<일주문의 모습, 진입방향과 오묘한 각도로 만난다>

 

일주문을 통과하면 거대한 만세루가 앞을 떡 하니 가로막는다. 그리고 그 만세루의 양 옆으로 계단들이 나 있다. 아래 그림은 일주문과 만세루를 사이에 두고 횡으로 바라본 풍경이다.(저 길 끝에 해우소가 있고, 대각암 올라가는 길이 나온다) 전반적으로 선암사가 위치한 곳은 경사가 급해 계단식의 단을 쌓고 각 영역을 구축하는 특징을 보여준다. 그러다보니 시간의 흐름을 두고 지어진 각 영역들의 축이 모두 제각각이어서 전체적인 통일성이 떨어질 수도 있으나, 이들 영역을 모두 담장을 둘러쳐 완벽하게 개별공간으로 독립시킴으로서 전체 가람의 완벽한 통일성보다는 마치 조그만 마을 혹은 어느 양반집 반가에 들어온 기분이 들도록 한 것이 특징이다.

 

티벳의 산사 건축이 그랬다. 모든 영역이 독립적으로 구분되어 하나의 완결배치를 이루고, 그 영역들이 또 하나로 합쳐 골목길과 광장을 만들어냈다. 마치 하나의 마을같은 구조......그리고 그 구조는 경사지에 놓여 층층이 겹침으로써 장엄한 광경을 만들어내는 것이 티베트 사원의 특징이었다. 그 느낌을 선암사에서 받았다.(우리나라에선 흔치 않은 구조이다. 아마 교리적 문제라기보다는 자연적 지형이 그런 유사성을 만들어냈으리라......)

 

<왼쪽에 일주문, 오른쪽에 만세루를 끼고 횡으로 바라보다>

 

만세루를 오른쪽으로 끼고 선암사 경내로 진입한다.(그렇게 동선을 잡은 것은 아이가 목이 말랐기 때문이다. 약수터가 만세루 왼쪽에 있어서리.....) 루 밑을 진입하는 것은 영남사찰에서는 흔하지만, 호남에서는 보기 드물다. 여기처럼 루 옆을 돌아 대웅전에 접근토록 되어 있는 것이 통상적이다. 지형의 단차를 이용해 층층이 겹쳐보이는 처마의 원근법적 풍경이 가히 환상적이다. 그리고 그 사이로 난 꼬불꼬불한 길들과 계단들......다듬어지지 않은 보행길......그 길들에 심어진 나무들과 꽃에서 나는 향내......그리고 저 위 계곡에서부터 내려온 물들이 모여 만들어진 약수터와 연못들, 인공폭포의 시원한 물소리......선암사는 그야말로 오감을 만족시키는 절이다.

 

<만세루 왼편으로 보이는 길과 대웅전 영역>

 

대웅전 영역은 4개의 건물이 둘러싸고 있는 자그마한 공간이다. 한쌍의 석탑(보물 395호)이 자리잡고 있는데, 특이하게도 석등은 없다. 그건 유독 이 절이 화재로 소실된 사례가 많았기 때문이다. 정유재란 이래로 몇 차례 화재가 있었고 지금의 건물들은 대부분 조선 후기 건물들이라 한다. 한창 번성할 때 50여채의 건물들이 지금은 25채 정도 남아있다.

 

<만세루 뒤편으로 빼꼼히 보이는 대웅전>

 

<대웅전의 위용>

 

남북의 대웅전, 만세루와 함께 'ㅁ'자 영역을 구성하는 동서의 전각들은 심검당과 설선당이다. 모두 수행도량인 선암사의 요사채들로, 허락없이는 접근이 어려운 지역들이다. 헌데 이런 조선 후기의 요사채들이 원형 그대로 보전되고 있는 것도 선암사 뿐이라고 한다. 이들 요사채들은 모두 완결된 'ㅁ'자 중정형 건물들인데, 지형을 살려 중2층(요샛말로 하면 '스킵플로어')의 구조로 된 특이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다음을 기약하며 대웅전 오른쪽에 위치한 지장전을 거쳐 더 위쪽으로 올라가본다.

 

<심검당 내부(출처: http://culturegrapher.com)>

 

 

 

<지장전의 모습>

 

대웅전 위쪽에는 원통전 영역이 자리하고 있다. 눈에 먼저 띄는 것은 너무 가깝게 붙어 보이는 불조전과 팔상전이다. 그리고 그 틈새를 비집고 '丁'자형의 원통전이 북쪽에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세운 시기가 원통전이 먼저라는데, 원통전 앞에 불조전과 팔상전을 저리도 답답하게 딱 달라붙여 세운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원통전 왼쪽에는 장경각이라는 전각이 있다. 가장 폐쇄적인 공간에 독립적으로 만들어졌는데, 바로 순조임금의 왕실원당으로 건립된 것이다. 즉, 불조전과 팔상전의 협소한 틈새 사이로 진입하면 원통전을 한바퀴 돌아 장경각에 이르는 참배동선이 완성되는 것이다. 일반인의 접근을 제한하고, 진입의 극적인 효과를 유도하기 위한 설계였으리라......

 

<팔상전의 모습....왼쪽에 불조전이 보이는데 그 틈새로 원통전 진입이 이루어진다>

 

<원통전의 측면모습, '丁'자형 모습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원통전의 회랑처럼 길게 뺀 지붕의 디테일>

 

<장격각의 모습...1930년대엔 2층 전각이었다 한다...계단 소맷돌 돌사자가 원당임을 암시해준다(출처: todamnongga.net)>

 

원통전 영역을 벗어나 이제 응진전 영역으로 진입한다. 원통전 영역이나 응진전 영역 모두 담으로 둘러싸인 개별적 독자공간을 구성하고 있다. 그리고 그 영역들 사이에는 나무들이 심어져 있는 길들이 자연스레 생기고, 광장(예전엔 연못이었다고 한다)도 조성된다. 여기 심어진 나무들은 모두 늙은 매화나무들이다. 초봄이면 홍매와 백매가 어우러져 피어나는 모습이 장관이라고 한다.(일부는 천연기념물로도 지정되었다)

 

<원통적 영역 뒤로 보이는 응진전 영역의 입구>

 

<원통전 뒷길의 매화나무>

 

응진전 영역은 가운데 응진전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미타전과 진영당, 왼쪽에 달마전을 두고 응진전 뒤편의 조그마한 산신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수평으로 맞춰 배치된 달마전과 응진전, 미타전은 사실 조금씩 set-back되면서 자연스레 동선을 미타전쪽으로 이끌고 있는데, 미타전 샛길로 빠져나가면 차밭으로 이어지도록 되어있다. 달마전은 형태가 기형적인데, 그 뒷마당으로 나가면 4대의 석조로 이루어진 물확이 자연스런 멋스럼으로 경탄을 불러 일으킨다.

 

<달마전 뒷뜰의 물확(출처:cafe.daum.net/buruna21)>

 

<입구에서 바라본 응진전>

 

<응진전 뒤편에 있는 산신각.....스케일의 극명한 대비>

 

<응진전에서 바라본 진영당......선암사의 고승들 영정이 전시되고 있다>

 

사실, 지금까지 구경한 선암사의 주요 영역 - 대웅전, 원통전, 응진전 - 외에도 봐야 할 영역이 하나 더 있다. 바로 무우전 영역이다. 응진전 영역 바로 오른쪽에 역시 축을 달리해 지어진 영역인데, 바로 태고종 종정이 기거하는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일반인 출입이 제한된 곳이다. 무우전은 'ㄷ'자 형태의 전각인데, 마치 그 전각에서 튀어 나온 듯 1칸의 '각황전'이 파격적인 공간구성을 하고 있다. 유홍준 선생님은 무우전 툇마루에서 조계산을 바라봐야 선암사를 제대로 봤다고 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아쉽지만 그 기회를 다음으로 넘겨야 겠다.

 

<'ㄷ'자형 무우전과 여기서 떨어져나온 듯한 각황전...각황전은 무우사에 기거하는 스님의 개인채플같은 곳이다(출처:doopedia.co.kr)>

 

이제 다시 원통전 영역 앞을 지나 삼성각을 거쳐 가람의 왼쪽 요사채 쪽으로 향한다. 북쪽에서부터 천불전, 창파당을 지나면 한쌍의 인공연못이 만들어져 있고, 다시 이를 지나 남쪽으로 가면 바로 해우소를 만날 수 있다.

 

<삼성각의 모습>

 

선암사의 해우소는 특히 유명하다. 아마 문화재로 지정된 유일한 화장실일 수도 있겠다. 임란을 거치면서도 살아남은 전각이라는데, 우선 'T'자형 구조가 특이하다. 안으로 들어가면 오른쪽의 여성용과, 왼쪽의 남성용으로 다시 나뉜다. 남성용은 4칸으로 2줄씩 배열되어 있는데, 약 120cm 정도의 좌우칸막이가 전부다. 앞쪽으로는 완전히 터져 있으며, 자리에 앉게 되면 벽에 터진 창살 너머로 바깥 경치를 구경하도록 되어 있다. 정말 멋진 화장실이다....

 

<해우소 입구>

 

<해우소 내부 모습>

 

이제 해우소를 끝으로 선암사 경내를 모두 둘러보았다. 시간이 남는다면 여기서 다시 의천이 수행했던 대각암까지 가보고 싶었으나, 아이들의 성화에 못이겨 그건 다음을 기약했다.

 

<해우소쪽에서 바라본 일주문과 만세루 방향>

 

<일주문 바로 옆에는 범종각이 있다>

 

일주문을 다시 빠져나가기 전, 다시 한 번 경내를 바라본다. 오른쪽의 심검당과 지장전, 왼쪽의 만세루와 대웅전이 서로 처마를 겹치며 어우러진 모습이 아름다워 차마 절을 떠나지 못하고 한동안 서성거렸다. 선암사......! 개별적인 전각들은 웅장하지도, 멋지지도 않지만 이 절은 뭔가 사람의 심성을 건드는 오묘한 아름다움과 편안함이 있다. 강요하지 않고, 본인이 스스로 느낄 수 있도록 짜여진 완벽한 각본대로 홀린 듯 돌아다니다보면, 어느샌가 어떻게 말해야할 지 모르겠지만, 그저 산사가 주는 매력에 푹 빠지게 된다.......그게 선암사인 것같다......

 

<만세루 오른쪽에 서서 아까 지나쳤던 길을 다시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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