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 여행, 문화]/건축이야기

(건축이야기33) 진짜 주거? 아니면 모두 죽어!

budsmile 2011. 8. 19. 12:30

막 고기잡이를 끝낸 멕시코의 어부에게 한 부자가 말을 걸었다.

"고기를 좀 더 잡아 시장에 내다파는 게 어떻겠소?"

"왜요?"

"그래야 돈을 벌 수 있지 않소......"

"돈은 벌어서 뭐하게요?"

"좋은 집도 사고, 은퇴 뒤 친구들과 데킬라도 마시고, 낚시나 하면서 여유를 부리지요"

"좋은 집에 낚시라......이보시오, 난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소......"

 

사람들은 '문명'과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내키지 않는 뭔가를 끊임없이 해대며 더 나은 미래를 꿈꾸지만, 그 꿈은 우리가 느끼지 못할 뿐 생각보다 가까이 있을 수도 있다.

 

세상에 그냥 일어나는 일은 없다. 반드시 거기엔 그럴듯한 이유와 내재된 동기가 잠재되어 있다. 심지어 무의미하고 불필요해 보이기까지 한 것이라도 말이다. 그것이 합리적이든 단순한 재미든 상관없다. 때론 그 욕망이 드러나기도 하지만, 위장되기도 할 것이다. 단지 그걸 깨닫지 못하고, 깨닫지 않으려 하는 게 문제라면 문제다.

 

어부와 부자의 대화에서 서로가 소통하지 못했던 것 중 하나는 '좋은 집'이다. 어부는 가족들과 함께 편안히 하루의 피로를 풀며 몸을 뉘일 자리가 있는 곳을 분명 '좋은 집'이라 생각했겠지만, 부자가 생각하는 '좋은 집'은 달랐다. 그가 생각하는 '좋은 집'은 아마 외벽을 대리석으로 치장하고 월풀욕조와 멋진 크리스탈 샹들리에가 있는 집이 아니었을까? 두 사람의 사고의 차이는 도대체 어디에 기인하는 것일까?

 

할 수 있는 것을, 마치 할 수 없게끔 보이게 하는 것......그것이 바로 '돈'이 만드는 환상이다. 우리의 집에는 어느샌가 그 '문명'과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여러가지 것들이 들어와 있다. 그것이 꼭 필요한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최첨단의 유행을 따라하고, 남이 없는 걸 가지고 있다는 게 더 중요해졌다. 이제 명품브랜드의 가전제품과 복제 '피카소'를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집주인은 예술적 안목과 문화적 소양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인식되는 '포스트모던한' 세상이다.

 

기업들은 이러한 상황을 놓치지 않는다. 기업의 생리상 끊임없이 고가의, 새로운 제품을 생산하며 더 많은 돈을 벌 것을 집주인에게 요구한다. 새로운 제품의 상당수는 집주인들이 자초한 것들도 많다. 고가의 제품을 소장하니 최첨단 경비시스템도 마련해야 하고, 더 넓게 살고 싶어 발코니를 확장하고 붙박이창을 설치하다 보니, 환기설비와 공기청정기, 시스템 에어컨도 필요하다. 이웃과 고립된 재미없는 생활을 탈피하기 위해 닌텐도와  SNS가 가능한 스마트폰도 필요하다. 사야 할 것은 점점 더 많아지고, 집주인을 현혹시키는 새로운 물건은 끊임없이 쏟아져 나온다.

 

그에 비해서 정작 우리가 사는 집은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기술적 투자도 없이 콘크리트 더미로 쌓아올린 판박이 구조물 그대로다. 당연하다. 건설회사 입장에서는 디자인이나, '지속가능성'에 투자할 가치가 없다. 좋은 디자인이 뭔지 관심도 없는 사람들에게는 마당에 잘생긴 소나무 두세 그루 심어주고, 외벽에 대리석 좀 붙여주고, 지붕만 요란하게 만들어 야간조명 한 번 쏴주면 그만이다.(집주인들은 그게 집값을 올리는 멋진 디자인이라고 굳게 믿는다.) 어차피 냉(난)방, 채광, 환기 등은 입주자가 돈을 들여 업그레이드할 것이고, 매립배관 등의 노후화로 인한 누수나 열효율 저하도 걱정없다. 나중에 30년 정도 지나면 재건축하는 게 오히려 수지타산에도 맞고, 집주인들도 그걸(노후화되고 안전에 위험하다는 진단이 내려지는 걸) 더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성의없이 만들어도 엄청난 마진은 보장되니 이렇게 남는 장사가 또 어디있겠는가?

 

물론 이런 상황이 완전히 틀렸다고는 단언할 수 없다. 하지만 사람들이 이러한 상황을 언제까지, 그리고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을 지 궁금하다. 사람들의 인내심만큼이나 더 궁금한 것은 한정된 지구의 자원과 자본이 이 '문명'이라 불리는 매커니즘을 어디까지 지탱해줄 수 있을 것인가이다.

 

생각해보면 그 문명이란 게 허약하기 짝이 없다. 더 많은 최신식의 가전제품과 사방이 꽉 막힌 큐브박스의 집은 엄청난 양의 에너지를 먹어야 하고, 그만큼 사라진 화석연료와 지구의 나무는 자연재해와 기후변화로 돌변해 우리의 생명과 재산을 위협할 것이다. 체면치레와 과시를 위해 버려질 운명의 많은 음식들을 만들기 위해 가공된 유전자조작 식품과 공장식으로 사육된 가축들이 우리의 건강을 다시 위협하는 것처럼 말이다!

 

당장 지진이라도 일어나 인터넷이 두절되고 전기와 수도가 끊기면 우리의 생활은 어떻게 될까? 아마 집에서 똥조차도 제대로 누지 못하는 '불쌍한 문명인'이 될 것이다. 더위 혹은 추위에 시달리고, 바람도 통하지 않는 동굴같은 집에서 당장 벗어나고 싶을 지 모르겠다.

 

이걸 과연 '발전'이라 부를 수 있는가? 집이 거추장스러워지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집'이 아니다. 단언컨대, 집을 '집'으로 만들어주는 것이 명품과 첨단제품이라면 그 집은 '진화된 주거의 발전표본'이 될 수 없다. 주거로서 편안함과 화목함, 기후에 대응하고 거주자들의 생존에 도움이 되는 환경은 '집'이 당연히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런 점에서 건축의 시작(beginning), 본질(원래 있어야 할 것)을 먼저 보려했던 루이스칸(Louis I. Kahn)의 충고는 다시 되새길 만하다. 즉, 교회를 지으려 하지 말고 '예배의 장소'를, 도서관을 지으려 하지 말고 '독서의 장소'를, 주택을 지으려 하지 말고 '가정의 장소'를 만드는 게 바로 건축이라는 그의 통찰은 여전히 유효하다.

 

(루이스칸의 엑시터도서관, 출처: http://gipsygeek.files.wordpress.com)

 

 

20세기 초 아방가르드 건축가들은 건축물에 덕지덕지 붙은 장식들을 모두 제거했고, 그렇게 순수한 입방체가 된 건축물을 통해 빛과 조형을, 환경을, 거주성을, 축조성을 재발견해나갔다. 그런 모더니즘의 정신은 이제 사라지고, 입방체의 건물에 온갖 장비와 미술품과 고가의 기기가 새로운 장식으로 덕지덕지 붙어버렸다. 사람들은 집을 살 때 이 공간이 얼마나 우리 가족에게 편안함과 화목함을 가져다줄 수 있을 것인가를 더 이상 보지 않는다. 대신 붙박이로 어떤 회사 제품이 제공되는지, 발코니 확장은 무료로 해주는지에 더 관심이 많을 뿐이다.

 

지난 5월 세종시 첫마을 2차 분양이 있었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대기업에서 지은 복층 펜트하우스 평면을 보고 뜨악했다. 1층에 부부침실과 부엌, 거실이 있고, 2층에 아이들 방이 있는 구조였는데 1층에 공용화장실이 없다. 손님들이 왔는데 볼일을 보려면 2층에 올라가든지, 부부욕실을 사용해야 한다. 부엌에서 나오는 온갖 쓰레기를 놔둘 외부공간 하나 없고, 세탁기는 2층까지 올라가 그것도 침실에 딸린 발코니에 놓아야 한다. 얼마나 많은 청약자가 이 평면에 자신과 가족의 삶을 대입해봤을까......근본도 지켜지지 못한 집......하지만 경쟁률은 거의 최고 수준이었다.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너무 많은 욕망으로 집을 채워넣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는 사이 우리는 미래만 바라보며 만족을 모르는 '돈'의 노예가 되어 버리고, 집은 '집'으로서 기능을 상실해버린 것은 아닌지......그저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지금 하면서 '좋은 집'에 살고 있는 멕시코 어부가 부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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