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 여행, 문화]/나만의 문화일기

뮤지컬 '지킬앤하이드'(2011.1.28)

budsmile 2011. 2. 13. 16:05

 

 

 

역시 들었던 명성 그대로였다......2004년 초연 이후 장기 롱런을 이어가고 있는 뮤지컬은 내 인생의 3시간에 해당하는 부분을 음악적, 정서적 카타르시스로 충만하게 만들어주기에 충분했다.

 

지킬앤하이드는 인간의 선과 악을 다룬 19세기 말 영국작가 스티븐슨의 소설을 뮤지컬로 만든 것이다. 브로드웨이 초연을 거쳐 한국에서만 500회가 넘는 공연횟수를 자랑한다. 특히나 브로드웨이에서는 흥행에 실패한 뮤지컬이었지만, 우리에겐 뮤지컬계 성공의 아이콘이 되었다. 선악이라는 지극히 서양적인 이분법적 논리와의 정서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 뮤지컬이 유독 우리의 감성을 울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줄거리는 대강 이렇다. 촉망받는 유망한 의사, 지킬은 그가 일하는 정신병원에서 환자들을 다루며 인간의 선과 악을 따로 분리해내어 통제가 가능하다는 새로운 이론을 정립한다. 그는 그 이론을 증명하고자 약품을 개발해 동물임상실험을 마쳤으나, 병원 이사회의 6명 귀족들(주교, 백작부인, 의사, 변호사 등)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인간에 대한 임상실험의 기회를 박탈당한다. 그는 마을의 가장 선망받던 숙녀 '엠마'와의 결혼까지 앞둔 젊은이였지만,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못하고 자신의 신체를 대상으로 실험에 들어간다.(이 때 그의 결심을 굳힌 건 아버지때문이었다. 그가 가장 존경하던 아버지가 정신병원에 있는 것을 괴로워하며 아버지를 위해 자신을 기꺼이 실험대상으로 삼겠다는 것인데, 이 때 나오는 노래가 저 유명한 '지금 이순간(This is the Moment)'이다.)  실험실에 틀어박힌 채 투약을 계속하던 그는 끝내 자신의 근저에 있는 '악'을 불러들여 '하이드'라는 괴물을 만들어낸다. 하이드로 변한 지킬은 위선을 일삼는 귀족들을 단죄하기 시작한다. 낮에는 자선사업가로, 밤에는 창녀촌에서 처녀성만 골라 매음을 일삼는 주교를 첫 희생물로 화형을 시키고, 이어 밤마다 그는 살인을 저지르기 시작한다. 마을은 두려움에 휩싸였고, 지킬은 이제 약물로도 통제가 되지 않는 하이드에 의해 지배당하기 시작한다. 그런 하이드가 밤마다 찾는 여자가 있었으니, 창녀였으나 내면의 상처를 안고사는 '루시'였다. 사실 루시는 지킬이 약혼식날 밤 친구들과 같이 간 술집에서 알게된 사이였다. 지킬은 하이드가 루시를 해꼬지할까 두려워 돈을 주고 멀리 피하라 하지만, 곧이어 하이드가 된 지킬은 그녀가 도망가려했다는 이유로 무참히 살해하고 만다. 하이드로 인해 심신이 피폐해진 지킬은 마지막으로 그를 억누를 수 있는 약을 개발하는데, 결혼식 당일에 하이드가 갑자기 지킬을 누르고 본색을 드러내는 바람에 또다시 살인을 저지르게 되고, 하나의 몸뚱아리를 놓고 하이드와 싸우게 된 지킬은 친구의 칼을 자신의 몸에 밀어넣어 자살하고 만다. 그런 지킬을 끝까지 이해해주고 기다려준 엠마의 눈물로 비극은 끝난다.

 

선과 악의 대결이라!......왠지 딱딱하고 무거운 심리극이 될 것같은 느낌이며 뮤지컬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봤던 심리극의 한계에 내심 불안했지만, 사실 이 극의 바탕이 된 소설은 심리소설이 아니라 괴기소설이다. 인간의 내면에 대해 그리 깊은 이해와 진지한 고민을 보여주지 않고 있다. 그저 지킬은 '선'(착한 청년), 하이드는 '악'(살인마)으로 구분하고(왜 그렇게 구분되는지 설명도 없다), 자칭 선과 악이 저지르는 행태를 극대화시키며 이야기가 전개된다. 따라서 그냥 한편의 공포영화를 보는 느낌 정도이며, 한 몸으로 두 개의 인격을 연기해야 하는 지킬(하이드)의 연기 관전이 이 뮤지컬의 포인트가 된다.

 

과연 '선'와 '악'이 무엇인가? 선과 악이 정말 전혀 다른 본성이며 이 두 가지가 독립된 각각의 인격이 될 수 있는 것인가? 19세기 이미 신학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인간의지를 탐하며 '계몽'과 '이성'의 시대를 연지 100년도 더 되었지만,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아직도 중세의 이분법적 신학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성의 대척점에 감정을 두고 이를 각각 선과 악으로 분류하며, 이 논리에 따라 감정에 대한 의도적인 폄훼가 일어났다. 일단의 의사들은 정신분열증이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는 뇌신경과 관련된 문제라 보고 환자들에게 전기쇼크, 심지어 뇌엽절제술을 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니체는 '선악을 넘어서'라는 자신의 책 제목에서와 같이 근본적인 문제는 선과 악의 문제가 아니라, 선으로 포장된 '가식'(다른 말로 종교, 규범, 전통, 도덕 등이라 불리는) 이며, 그 가식을 이용해 일반 사람들의 감정을 지배하기 위한 권력의 술수로 선악의 이분법이 이용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사람들은 그러한 것들이 선험적인(태초이래 원래부터 있어왔던, 그래서 그것에 대한 의심마저 허용되지 않는) 것들이라 받아들여야만 했고, (이 부분에서 18세기 이성의 최고봉 '칸트'가 기독교의 교리와 어찌나 닮았는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 사회적 규범에서 도태되면 '악'이 씌어진 '정신병자'가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선과 악은 원래부터 구분이 되지 않는 하나였으니, 선과 악의 구분 자체가 '니힐리즘(허무)'이라 말하는 니체의 이론적 주장을 넘어 프로이트는 무의식을 내세운 새로운 학문, 정신분석학으로 감정이란 존재를 과학적으로 입증하고 사회적 구속에서 해방시킨다. 똑같이 획일화된 이성(규율)으로 묶여버린 사회에서 나의 개성, 나의 성격, 나의 자아, 나의 존재라는 개념이 세상으로 나오는 순간이다. 지금은 누구나 자연스럽게 내뱉는 말이지만, 그 관념이 형성되는 데에는 시대정신을 바꾸는 엄청난 변혁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지킬(선)이 완벽한 다른 인격체인 하이드(악)로 바뀐다는 설정은, 그리고 그 두 인격체간 싸움이 발생한다는 이론은 그래서 순박한 이분법적 논리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보자......지킬은 자신의 임상실험이 좌절된 데 대해 귀족들을 비꼰다. 가식덩어리라 울부짖는다. 하지만 그 자체가 당시 '주교' 혹은 '귀족'이라는 신분이 '선'을 보장해준다는(심지어 그가 매음굴에 가든 말든 말이다!!!) 사회관념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이다. 그 자체로서 그는 이미 그 사람들을 증오하고 미워했다. 다만, 하이드로 변하고 나서야 그에 대한 응징(살인)이 가능했던 것이다. 하이드가 저질렀던 행동은 지킬이 품었던 마음의 연장선상에 있다. 자......지킬은 과연 절대선인가? 하이드가 절대악인가? 구분이 가능한가?

 

그렇다면  창녀 '루시'는 왜 죽였을까? 지킬일 때 미워하지도 않았고 연민을 보였던 사람인데......지킬은 극중에서 연민과 동정의 마음을 보였지만, 분명히 마음속에는 그녀에 대한 사랑이 있었다. 그것도 '엠마'와의 플라토닉 러브와는 전혀 다른 자신의 말초적 본성을 마음껏 드러내고픈 육체적 소유욕이 말이다. 루시에게 마음을 들킬 것같아 지킬은 그녀를 도망시키려 하지만, 지킬의 마음을 아는 하이드는 그녀를 죽여서라도 소유하겠다는 욕망을 실현시킨다.

 

그런데 아직까지 의문이 남는다. 왜 이 극의 스토리가 유독 한국에서 감명깊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일까? 우리에겐 아직도 사람들의 자유로운 정신을 구속하고 강제하는 이분법적 도그마가 지배하고 있는 것인가? 그래서 하이드를 보며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일까? 지킬을 보며 자신에 대한 연민을 표현하는 것일까? 

 

재미있는 것은 신분제의 붕괴가 이루어지고 있는 과도기적 시기에 사회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는 방식이 우리와 서양이 사뭇 달랐다는 것이다. 우리는 양반전이니 호질이니 하며 위선적인 양반제를 풍자하는 해학이 가득했지만, 서양에선 이리도 무시무시한 소설을 만들어냈으니 말이다.....^^

 

암튼 주연배우(류정한)의 완벽한 카리스마와 연기력, 감정을 잘 살린 노래와 화려한 무대세트, 조명과 스탭들의 착착 맞아떨어지는 호흡이 일품인 뮤지컬이었던 것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