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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2010.11.20)

budsmile 2010. 11. 29. 18:00

 

괴테의 역작,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동일한 제목의 이 뮤지컬은 동명 소설을 무대로 옮긴 순수 국내 창작 뮤지컬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베르테르 효과'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 소설이 처음 출간될 때 유럽사회의 반향은 엄청났다. 그러나 단지 소설을 읽고서 그 주인공 베르테르의 비극적 결말을 그대로 모방했다는 것은 소설이 출간된 지 200년도 훨씬 지난 시대를 사는 나로서는 선뜻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지만, 어쨌든 이는 이 소설이 가진 감정이입이 얼마나 지독했던 것인지, 괴테라는 작가가 얼마나 위대한 문호인지 새삼 떠올리게 하기 충분했다. 

 

내용은 대강 이렇다. 젊은 변호사 '베르테르'가 우연히 발하임이라는 도시에 왔다가 '샤롯데'에게 한 눈에 빠져버리고 만다. 그녀의 애정어린 말투와 포근함, 이해심 많은 배려에 소심한 성격의 그는 완전히 푹 빠지고 만다. 그러나 곧 그녀가 약혼한 사이라는 것을 알고는 방황한다. 그녀를 잊기 위해 다른 곳에 가 있기도 했지만 결국 잊지 못하고 마음이 시키는 대로 다시 돌아온 그는 다시는 여기 오지 않겠다며 대신, 그녀에게서 사랑을 확인받고 싶어한다. 하지만 샤롯데의 어정쩡한 태도에 더욱 더 갈망이 커져버린 그는 1차적으로 샤롯데의 집에서 자살을 시도했지만 실패한 채, 알베르티(샤롯데의 약혼자)에 의해 쫓겨난다. 그녀에게 남긴 편지를 마지막으로 감정을 정리한 베르테르는 심부름꾼을 시켜 1차 자살을 시도할 때 사용한, 샤롯데의 집에 걸린 권총을 빌려달라고 청한다. 먼 여행을 떠날 거라며, 그 때 필요할 거라며(이건 소설에도 나오는 얘기지만, 왜 그가 그런 상황을 만들어야 했는지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샤롯데에 기회를 준 걸까? 자신의 충동을 막을 기회? 아님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 죄책감을 느낄 기회? 알베르티에 대한 복수의 기회?......그 권총은 알베르티의 동의하에 심부름꾼에 전해졌고 마음속에 연민을 품고 있던 샤롯데는 베르테르 자살 후 결국 알베르티를 원망하게 될 거니까.....)......그리고 그 권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쏜다.

 

그런데 이 소설을, 그것도 1인칭의 서한체로 된 소설을, 순수히 '짝사랑'이라는 '단순한' 심리구조 하나만을 가지고 그 심리구조 안에 질투, 배신, 연민 등의 모든 갈등과 감정을 담아 결국 파국으로 치닫는 모습을 디테일하게 보여주고 있는 그야말로 '심리소설'을 뮤지컬로 옮긴다......! 그 발상에 대해 존경심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기대반 우려반으로 본 뮤지컬은 소설의 형식을 거의 완벽하게 재현해 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래서 2% 부족하게만 느껴진다. 너무도 완벽하게 재현하려고 한 탓인지, 뮤지컬은 내용면에서 '문학'으로부터 한 걸음도 앞서 나가지 못하고 뮤지컬 무대가 가진 다양한 극적인 구성을 더 '발굴'해내는데 소홀했거나, 애써 무시했다. 

 

소설에서 보여주는 베르테르는 오직 '짝사랑'의 심리에 갇혀버린 그의 '일관된', 그래서 '단조로운(감정이 단조롭다는 것이 아니다!)' 모습뿐이다. 그의 다른 모습 - 예컨대 그의 어린시절, 사생활, 인생관, 인간관계 등등 - 은 그 전체적인 흐름 속에서 잠깐씩 엿볼 수 있지만 그것 역시 최대한 억제된 채 스토리를 풍부하게 하기 위한 양념정도로 치부된다. 그러나 독자들은 그 조각난 퍼즐과도 같은 에피소드로부터 많은 상상을 할 수 있게 되며, 그로부터 베르테르라는 인간을 완성하고 이해하게 된다. 한편으론, 독자들이 전체적인 글의 흐름을 흐트러뜨리지 않으면서 주인공의 감정에 지속적으로 몰입할 수 있게 해주는 장치인 것이다. 괴테가 플롯 구성의 한계가 있으면서도 과감히 서한체의 소설을 작성한 이유일 게다.

 

비슷한 고민을 뮤지컬의 연출가나 극작가가 했으리라 난 생각한다. 하지만 시간상의 제약 때문이었을까? 극의 흐름을 쫓아 베르테르가 샤롯데를 만나서 자살에 이르기까지의 감정라인이 나에게 용납되지 않는다. 아니, 이해되지 않는다. 그저 짝사랑을 쫓다가 실패하자 억지를 부리다 충동적으로, 아님 감상에 젖어 자살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분명히 원작에서 보여주려는 것과는 다르다. 이는 뮤지컬에서의 감정라인을 보여주는 방법이 '극'이라는 풍부한 장치들을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베르테르 역을 맡은 주인공의 탁월한 연기에  너무 과도하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은 아닌지 생각해본다.

 

차라리 이성과 합리성을 보여야만 하는 변호사라는 직업과 대비해 인간 본연의 감정도 제대로 된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우는, 그래서 시대고민을 안고 사는 베르테르를 보여주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실제로 괴테가 살았던 18세기는 바야흐로 계몽의 시대다. 모든 것이 회의되고 인간성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통해 '이성'과 함께 인간을 구성하는 '감정'에 대해 새로운 평가가 이루어지던 시기다.) 자신이 모시던 주인마님에 결국 사랑을 고백했으나, 이루지 못한 사랑에 살인을 저지른 하인을 변호하는 베르테르의 모습이 그래야 더욱 더 설득력있게 다가오지 않았을까? 그저 살인자를 옹호하는 베르테르를 보며 '난 이해 못해'라고 읖조리는 알베르트의 독백처럼, 이 장면을 보는 관객도 뜬금없는 베르테르의 살인자 변호에 어리둥절했을 것같다.

 

더 나아가 소설에서 묘사하지 않는 베르테르의 다른 면모를 보여주며 그를 새롭게 해석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가령 베르테르와 알베르티와의 경쟁관계를 더 극화시키거나, 샤롯데와의 '엇갈린' 사랑을 통해 긴장을 고조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아쉽게도 뮤지컬에서 그러한 극적 요소는 없다. 그래서 단조롭다. 내용이 비극인 탓에 분위기도 무겁다. 시종일관 대부분 단조로 구성된 노래들은 분위기를 더욱 더 무겁게 한다.

 

앞서 말했지만 모든 스토리의 당위성을 극적 효과보다는 주인공 베르테르의 심리묘사에 중점을 두었으니, 이 역이 차지하는 비중은 이 뮤지컬의 거의 전부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이 배역에는 연기력과 가창력이 검증된 배우가 설 수밖에 없다. 배우로서는 자신의 능력을 검증받을 수 있는 통과의례같은 뮤지컬인 셈이다. 조승우, 엄기준 등 그동안 이 배역을 거쳐간 배우들의 면면을 봐도 그렇다. 내가 봤던 공연에선 요새 드라마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송창의가 주인공 배역을 맡았다. 1차 자살시도에 실패하고 거리를 방황하며 보여준, 눈물이 곧 쏟아질 듯 글썽글썽해진 감정연기는 압권이다. 알베르티를 만난 샤롯데가 둘만의 행복한 이중창을 부르는 모습을 보며 그 사이사이 자신의 허탈함을 끼워놓는 불협화음같은 삼중창은 절묘하다. 앞으로 기대되는 배우다.

 

이번 공연에는 또 그가 얼마전까지 출연했던 드라마(인생은 아름다워) 팀이 관람와서 또다른 재미를 선사했다. 드라마를 본 적은 없지만 연기자들을 가까이서 보는 것도 색다른 즐거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