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야 독서노트를 쓰려고 컴퓨터를 켰다. 700쪽이 넘는 엄청난 분량의 책을 읽은지 한달도 더 넘었는데, 읽고나서도 독서노트를 쓸 엄두가 안났다. 머릿속으로 정리하면 할수록 자꾸 확장되는 생각에 지적유희(좋은 말로 하면 그렇고, 나쁜 말로 하면 '게으름')를 즐기다가 이래선 영영 못쓸거 같아 지금이라도 글을 쓰기로 했다.
토마스 프리드먼은 유명한 뉴욕타임즈의 칼럼니스트다. 퓰리처 상만 세 번을 받았고, 수많은 저서에서 언론인 특유의 사실적이면서도 냉철한 분석을 통해 우리가 TV나 신문에서 볼 수 없었던 이면의 많은 사실을 알려준다. 특히, 그는 이 책을 통해 79년부터 약 10여년간 중동특파원으로 근무하면서 보고 느낀 중동지역의 현실에 대해 가감없이 보여주면서 일약 중동문제 전문가가 된다. 유태인이기도 한 그가 과연 팔레스타인 문제를 제대로 보여줄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은 곧 기우였음이 드러난다. 그는 응당 저널리스트로서 가져야 할 균형된 시각을 위해 자신의 경험뿐 아니라 주변 사람(시장상인에서부터 게릴라, 거물급 정치인에 이르기까지)의 인터뷰로 책을 구성했다. 두꺼운 책이지만 마치 현장에 있는 듯, 소설을 읽는 듯 술술 넘어가는 재미까지 느껴지는 이유다. 하지만 그는 팩트(진실)의 나열 속에서 우리 모두에 참고할 만한 '진리'를 발굴해낸다. 그 '진리'는 그가 거의 마지막 부분에 언급하고 있지만, 이 책을 읽는 동안 내 생각도 자연스럽게 그가 발견한 진리와 동일하게 접근하게 되는데, 이는 글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저널리스트로서의 뛰어난 역량때문에 가능했던 거라 생각한다.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부분은 약 5년간 특파원으로 활동했던 레바논에 대해, 나머지 부분은 또다른 5년여를 보낸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 대한 것이다. 중동의 대표적인 분쟁지역 2곳을 다루고 있는데, 이 두 곳은 서로 '다른듯 같은', '같은 듯 다른' 상황을 보여준다. 시지프스의 돌처럼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분쟁은 마치 나사하나가 빠져 계속 빙글빙글 도는 인형과도 같다. 문제는 그 '나사'가 여러 상황으로 인해 인간의 능력으로는 결코 만들어질 수 없는 성질의 것이라는 점이며, 따라서 요점은 '나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부품이 부족한 상태에서라도 인형이 인형으로서 최소한의 구실을 하도록 만드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1. 레바논은 참 독특한 나라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오스만투르크 지배하에 있던 이 지역은 영국(팔레스타인과 요르단)과 프랑스(레바논과 시리아)의 지배를 받아 분할된다. 레바논은 이 지역의 기독교인들이 프랑스의 도움을 받아 독립한 국가다. 기독교인들은 이 지역에 살고 있던 이슬람교도들을 레바논이라는 국가의 틀 속에 포용하기 위해 정치협정을 맺는다. 즉, 대통령은 기독교계가, 총리는 수니파 이슬람이, 의회대변인은 시아파 이슬람이 맡으며 의회비율은 기독교계와 이슬람계가 6:5로 분할하는 권력분점에 관한 협정이었다.
<레바논의 복잡한 종교분포를 보여주는 지도>(출처 : www.globalsecurity.org)
이후 레바논은 평화 속에서 번영의 길을 걷는다. 수도 베이루트는 한때 동양의 파리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온화한 기후, 지리적 이점을 이용한 무역 등으로 중동의 떠오르는 비즈니스 시티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인구구성에 변화가 일어났다. 이슬람교도의 숫자가 기독교도의 숫자를 훨씬 초월해 인구의 2/3를 차지하게 되었고, 그 중에서도 특히 시아파 이슬람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종교를 매개로 한 권력분점은 한계를 드러냈다. 이슬람교도들은 인구비례에 따라 기존의 협정을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레바논의 선택은?
2. 이들은 그간 중동에서도 독특하게 쌓아올린 민주주의의 전통과 축적된 부를 바탕으로 합리적인 절충안을 찾아냈을까? 아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부와 명성을 더 쌓아올리는 대신에 '하마의 규칙'을 적용했다.
'하마의 규칙'이라니? 이는 토마스 프리드먼이 붙인 이름이다. 1982년 시리아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인 하마(Hama)에서 일어난 사건을 빗댄 말이다. 현재도 정권을 유지하고 있는 시리아의 아사드대통령은 1979년 국방장관의 신분으로 쿠데타에 성공한다. 그리고 그는 철권통치를 감행한다. 더구나 수니파 이슬람이 대부분인 시리아에서 그는 소수파인 알라위파의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철권통치를 위해 알라위파를 요직에 앉히고 수니파를 억압하기 시작한다. 당연히 수니파는 이에 반발하기 시작했고 아사드는 그들의 근거지, 하마를 폐허로 만든다. 도시를 봉쇄한 채 어린아이건 부녀자건 가리지 않고 자국민을 학살한 후 집이건 사원이건 모든 건물을 불태워 없애버렸다. 아직까지 정확한 사상자 수와 피해규모에 대해 알려진 바 없을 정도로 철저히 베일에 가려진 사건이다. 그런데 시리아의 권력층들은 서구언론에서 보도하는 피해자 규모에 불쾌한 반응들이다. 사망자 6천명이라는 추측에, 가소롭다는 듯 최소 3만 8천명이 죽었을 거라고 자랑(?)까지 했다고 한다. 도대체 자국민을 죽인 것을 자랑하는 이들의 정신적 상태는 무엇일까? '자국민'이라는 개념이라도 있는걸까?
프리드먼은 이 사건을 이해하려면 중동인들의 정서적 특수성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서구의 지배를 받으며 근대국가의 형태로 독립했지만, 여전히 정서적으로는 부족적 전통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본다. 부족한 자원을 가지고 이들은 부족 대 부족으로 전쟁을 해야 하며, 그것도 한 쪽을 완전히 쓸어버려야 보복을 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사막에선 이들의 분쟁을 조정해줄 그 무엇도 없었다. 완벽한 힘의 논리가 작용하는 이 중동정치의 유목민적 특수성이 바로 '하마의 규칙'이라는 것이다.
3. 종교에 기반을 둔 레바논의 정치계파들은 변화하는 시대에 대응하는 방법으로 이 구시대적인 '하마의 규칙'을 따랐다. 기독교계에서는 팔랑헤 민병대를 창설했고, 수니파는 요르단의 후세인왕과의 권력투쟁에서 패하고 쫓겨난 아라파트의 PLO(팔레스타인 민족해방전선)를 받아들였다. 내전이 발발한 것이다(1958년). 그들은 전 국토를 갈기갈기 찢어놓고, 베이루트를 동서로 분단시켰다. 문제는 이들이 자신들의 부족한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외세를 끌어들였다는데 있으며, 이는 두고두고 이 나라 역사에 되돌릴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즉, 수니파의 PLO 유입은 자연스레 이스라엘의 침공을 가져왔다(1982년). 이스라엘은 기독교 팔랑헤 민병대를 도와 샤브라와 샤틸라와 같은 난민촌(팔레스타인 난민뿐만 아니라 저소득층 시아파 레바논 무슬림들이 살고 있는)에서의 무차별적인 학살을 암묵적으로 도와주었다. 이스라엘의 레바논 무슬림 평정은 초기에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보였으나, 어느 순간 이들은 자신들이 레바논 권력투쟁의 한복판에서 헤어나올 수 없는 늪에 빠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답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자국병사들의 피해가 커지자 이들은 굴욕감을 가지고 무조건 철수를 감행한다(1985년). 하지만 레바논 남부에 대한 그들의 통치는 그 짧은 기간만큼이나 레바논에 대한 짧은 이해로 인해 이 지역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시아파 무슬림들의 비위를 건들게 된다. 초기에 이스라엘에 우호적이었던 레바논 시아파 무슬림들은 결국 '헤즈볼라'라는 과격파 근본주의 단체를 결성하게 되며, 이들은 이란과 시리아의 지원을 등에 업고 현재까지 이스라엘의 가장 큰 적으로 남게 된다.
4. 팔랑헤 민병대 지도자가 레바논 대통령에 당선된 뒤 곧바로 암살당하자 미 해병대가 평화유지군의 일원으로 참전한다(1982년). 그들은 경찰로서의 역할을 자임하며 레바논의 치안을 바로세우고 민주주의를 회복하겠다는 거창한 논리를 내세웠다. 하지만 이 역시 레바논을 이해하지 못한 극히 '순진한' 생각이었다는 것이 곧 밝혀진다. 정치계파간 내전에서 치안의 안정이란 결국 어느 한 계파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는 것이며, 이는 전체를 아우르는 경찰역할이 애시당초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기독교계의 편에 서서 내전의 한복판에 발가벗겨진 미군은 모든 무슬림 계파의 적이 되었으며, 결국 베이루트 공항에 있던 해병대 사무실과 대사관이 차량폭탄테러로 부서지자 무조건적인 철군을 감행한다.
5. PLO는 어떠했을까? 여러 정치계파를 묶어 출범한 PLO는 아라파트라는 걸출한 인물에 의해 오랫동안 운영되어왔다. 그는 타고난 정치인이다. 그는 팔레스타인들, 더 나아가 모든 세계인들이 '팔레스타인 = 아라파트'라는 상징을 받아들여지도록 만다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능력으로 그는 갖은 어려움 속에서도 권력을 유지하며 정치생명을 이어나갔다. 이스라엘이 그를 충분히 제거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살려두었던 것은 그가 가진 정치적 상징성이 컸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 그가 가진 기본 입장이 이스라엘로서는 오히려 이용할 만한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고?
6. 팔레스타인은 처음엔 그저 지역명에 불과했다. 팔레스타인 땅을 나눠서 반쪽에 유대인국가를, 반쪽에 아랍인 국가를 세우라는 1947년의 UN결의안은 유대인과 아랍인 모두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유대인들은 성서에 언급된 조상들의 활동무대를 모두 현대의 이스라엘 땅으로 갖고 싶어했다. 아랍인들은 자신들의 땅에 갑자기 굴러온 이민족이 군림하는 것을 한 치도 용납하지 못했다. 분쟁은 당연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우선 UN결의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일단 국가를 세운 뒤 나머지 땅들을 되찾겠다는 속셈이었다.
<팔레스타인 권역도>(출처 : 론리플래닛)
팔레스타인인들은 둘로 나뉘었다. 이스라엘이 건국된 땅에서 하룻밤만에 보상 한 푼 없이 모든 재산을 압류당하고 쫓겨난 주민들은 요르단, 레바논 등 각지로 난민이 되어 흩어졌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아니지만, 1967년 6일 전쟁이후 이스라엘의 점령지가 된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의 나머지 반쪽의 주민들은 이스라엘의 하류 국민이 되어 온갖 감시와 불평등을 감내하는 식민지 주민이 되었다.
이 지역의 처음 포커스는 당연 이스라엘 땅에서 쫓겨난 팔레스타인 난민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집과 땅을 되찾기 원했고 그러기 위해선 당연히 이스라엘의 존재를 부정해야했다. 현실을 부정하는 과격한 생각- 하지만 세계인들로부터 동정받는-은 바로 PLO의 기반이었고 아라파트의 정체성이었다.
더구나 6일 전쟁 이전에 1948년 1차 중동전쟁에서 이집트와 요르단은 이스라엘을 몰아낸다는 명목을 내세워서는 각각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을 점령한 적이 있었다. 그들은 팔레스타인인들을 도울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며 오로지 이스라엘을 핑게로 주인없는 땅을 차지하겠다는 영토적 야욕만 드러낸 셈이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그래서 주변의 아랍인들을 믿지 못했다. 그들이 하나된 목소리로 아라파트를 연호한 이유다.
그렇지만 이스라엘 역시 이러한 상황을 역이용했다. 아라파트의 과격한 정체성을 문제삼아 레바논을 침공하고 요르단강 서안 등 UN결의에서 팔레스타인인들에 할당된 지역마저 불법점령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이지만, 아라파트를 견제하기 위해서 새로운 정치단체 '하마스'를 지원하기까지 했다.
7. 아라파트는 시대적 상황과 팔레스타인인들의 열망을 담아 과격투쟁에 나서지만, 요르단에서 쫓겨나고 레바논에서 이스라엘에 쫓겨 다시 튀니지까지 본부를 옮긴다. 그의 정치생명이 끝나는 듯했다. 하지만 상황은 반전된다. 이스라엘 점령지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저항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인티파다'로 불리는 이 저항운동은 일종의 불복종 운동이었다. 사실 이들은 이스라엘로부터 집이나 땅을 빼앗긴 것도 아니며, 오히려 이스라엘로부터 일자리를 얻어 먹고 살기에 다른 나라로 쫓겨난 팔레스타인에 비해 온건한 편이었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부정하기 보다 나머지 땅에서만이라도 독립, 그도 안되면 평화를 공존하는 자치를 누리길 원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당하는 불평등과 차별, 감시와 굴종에 대해 자신들의 밥줄을 걸고 하나로 뭉쳐 투쟁을 시작했다. 이로써 팔레스타인은 이제 단순한 지역명이 아닌, 하나의 민족개념으로 세계인들의 머릿속에 각인되기 시작한다. 아라파트는 재빨리 이 광범위한 투쟁을 지지하고 나서면서 자신의 정치적 재기를 노렸다. 아라파트가 이스라엘의 존재를 부정하던 자신의 기존 입장을 버리고 이스라엘과의 평화적 공존이라는 타이틀로 정체성을 갈아 치운 건 바로 이러한 시대적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8. 이스라엘의 사정은 좀 더 복잡하다. 이스라엘은 처음 건국 당시 3가지의 이상향을 꿈꿨다고 한다. 1. 유대민족국가, 2. 민주주의 국가, 3. 팔레스타인 전체를 차지하는 영토......하지만 이 세가지는 항상 이율배반적인 가치가 된다. 1947년 UN결의대로 반쪽의 팔레스타인에 만족하고 살면 당연히 3번은 실현불가능이다. 그렇다고 1967년 이후부터 지금까지의 상황처럼 팔레스타인을 정복하여 3번을 만족하고 나니, 이번엔 2번이 되지 않는다. 왜냐면 아랍인들에까지 선거권을 주면 1번을 만족시킬 수가 없으니 당연히 그들을 난민정도 수준으로 대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영원한 딜레마다.
이스라엘은 그렇다 하더라도 처음엔 3번을 너무도 원했다. 땅에 대한 욕심도 욕심이지만, 자국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팔레스타인인들을 억압하고 레바논의 팔레스타인 난민촌 학살을 방조하는 것을 본 다른 국가, 특히 미국의 유대인들은 회의에 빠진다. 이스라엘이 하고 있는 행동이 과거 히틀러 치하 독일의 만행과 다를게 무엇인지, 이게 진정 유대인들이 원하던 나라였는지 말이다. 또한 1차 걸프전에서 이라크의 후세인이 이스라엘에 스커드 미사일을 발사하고 이란이 핵을 개발하면서 이스라엘이 평화를 위해 팔레스타인 지역을 볼모로 잡아야 한다는 당위성도 없어졌다.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은 완충지대와 관계없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인들의 인티파다를 겪으면서 그들을 자신들과 영원히 동질화될 수 없는 이방인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유대인들은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달라진 상황 만큼이나 다른 방법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여기서 이스라엘과 아라파트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졌다. 미국의 거듭된 중재에도 실패하던 평화협상은 오히려 미국을 제끼고 당사자들간에 급진전될 정도로 흘러갔다. 1993년 그들간의 자발적인 오슬로선언이 세상에 알려졌고, 불과 1달 후에는 백악관에서 이스라엘의 라빈총리와 PLO의 아라파트가 악수하는 역사적 장면이 연출되었다. 그리고 그 공로로 그 두 사람은 1994년 노벨평화상을 받는다.
<1993년의 역사적인 백악관 회동>(출처 : www.israelpolitik.org)
9. 이 지역의 평화는 이제야 걸음마를 뗐다. 그것은 이 지역의 정치적 역학구도가 변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사람들 한 명 한 명의 의식변화가 컸다. 레바논도 그렇지만 '일상화된 불안'은 사람들에게 철학적 성찰을 가져왔다. 그저 정치인들간의 전쟁놀음에 묵묵히 희생을 강요당해야만 하는 현실이 사람들에게 변화를 갈망시켰다. 총격전이 벌어지면 잠시 숨었다가, 멈추면 다시 평화가 온 것처럼 슈퍼마켓에 가고 식당에서 밥을 먹는일이 자연스런 일상사가 되었다. 폭탄테러로 누군가가 희생되는 일이 잦아지자 어느샌가 희생자의 이름따윈 신문에 나오지도 않는다. 그저 몇 명이 죽었다는 것이 전부다. 젊은이들은 꿈과 미래를 차압당했고 개인 개인이 인격적인 대우를 받지 못하는 상황......거의 모든 사람들은 내전으로 자신의 가족이나 친구가 희생됐고 자신도 언제 죽을 지 모른다는 불안으로 하루하루를 살게 되는 상황......침묵하던 다수는 이제 침묵을 넘어 행동을 보이게 된다.
하지만 현재의 상황을 유지하려는 세력 역시 만만치 않다. 하마스는 이스라엘 민간인을 향한 자폭테러를 수시로 자행해 지금의 이 불안이 라빈의 평화정책때문이라는 유대인 내부의 분열을 꾀했다. (결국 라빈은 1995년 극우파유대인에게 암살당하고 만다.) 이스라엘의 정통파 랍비들은 이스라엘 건국으로 인해 해이해진 유대인들의 종교관을 질타하며 자신들이 불법점령한 땅을 절대로 양보하려 하지 아니한다. 2천년의 방랑을 거치면서도 유대인들이 살아남은 것은 바로 그들의 종교관때문인데, 이제 이스라엘이 건국된 마당에 그 종교관을 엄격하게 지키려는 젊은 사람들이 없어진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종교관을 완성하려면 성서에 나오는 옛 땅들을 모두 되찾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라빈의 '땅과 평화를 교환하려는 정책'이 시작되었지만, 그들은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정착촌을 더 많이 건설해나감으로써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이스라엘 정부를 믿지 못하도록 불신을 조장했다. '일상화된 불안'이 계속되기를 원하는 측은 자신들의 정치적 계산하에 무고한 사람들을 희생시켜 가며 갈등과 분열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10. 프리드먼은 역설한다. 평화는 시작하기보다 유지하는 게 더 어렵다고......평화를 위한 머나먼 길이 시작되었지만 그 평화를 다시 원래의 전쟁상태로 되돌리려는 세력들의 시도는 숙명처럼 계속 이어질 것이라고......그러나 그 시도에 끝까지 맞설 때만이 평화를 지킬 수 있는 것이라고......그리고 바로 그것을 할 수 있는 것은 일반 시민들의 몫이라 생각한다. 역사를 되돌리려는 시도로 인해 일부 무고한 사람들이 죽거나 다칠 수도 있지만, 이를 감정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평화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감정에 따라 흔들리는 것은 결국에는 일반 평범한 사람들, 바로 자신들의 목에 다시 총구를 겨누게 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프리드먼은 역설한다. 평화를 쌓기 위해서는 반목하고 있는 세력들간에 신뢰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상대방의 실체를 인정하고, 현재의 상황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모든 문제의 해결이 시작된다고......그래서 이 모든 것들이 '말없는 다수'의 대세로 굳어질 때 역사를 과거로 되돌리려는 모든 시도는 힘을 잃을 것이다.
기가 막히지 않는가......이 단순하면서도 어려운 분쟁해결의 진리는 중동 외 모든 분쟁국가에 적용가능할 것같지 않은가? 한 대 맞으면 열받아서 상대방을 꼭 한대 패고야 마는, 조폭스러운 감정적 논리가 국제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 현실에서 진정 평화를 향한 길이 무엇인지, 정치인들의 술수에 말려들지 않고 우리 자신의 평화와 안정을 어떻게 하면 지킬 수 있는지 이 책은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책의 첫 부분, 서문을 대신해 허클베리핀의 한 부분이 인용된다. 허클베리핀에게 왜 너희 집안은 특정 다른 집안과 사이가 안좋아 그리 싸워대는지 물어본다. 앙숙이기 때문에 그렇단다. 그런데 그게 언제부터, 무엇때문에 그렇게 앙숙이 되었는지는 아무도 말하지 못한다. 바로 이것 아닐까? 증오는 또 다른 증오를 확대 재생산할 뿐이며, 그저 관습처럼 싸움이 일상화되면 그걸 깨뜨리는 것은 더욱 더 요원해질뿐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피해는 고스란히 그 싸움에 무의식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것이 평범하지만, 이 책이 주는 '굉장한'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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