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모스크바 배낭여행중의 일이다. 붉은 광장에 가는 도중 갑자기 지하철이 멈췄다. 조명등과 에어컨도 모두 꺼졌다. 사람도 별로 없었지만, 절대고요의 상태로 10여분이 지나자 식은땀으로 온몸이 젖었다. 그 때 난 내가 공황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심장이 뛰기 시작했고, 몸이 뒤틀리면서 발작이라도 할 성 싶었다. 왜 그랬을까? 서울 평균(10-20m)의 최고 5배나 되는 땅속 100m 깊이에 대한 압박감이었을까? 아니면 좁은 전동차 공간이 주는 불안감 때문이었을까?
의문은 더 커져갔다. 나만 그랬을까? 그게 아니라면, 특정한 공간이 과연 인간에게 보편적인 공통의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을까? 건축에서도 스탕달 신드롬(훌륭한 예술작품을 접하면 극도로 흥분하는 원인미상의 증후군)이 가능할까?
끝이 보이지 않는 모스크바 지하철역의 에스컬레이터 <출처:www.sccs.swarthmore.edu>
미국의 건축거장 '루이스칸(Louis Kahn)'의 대표작으로 센디에고 근교의 '소크 생물학 연구소(The Salk Institute for Biological Studies)'가 있다. 창립자 소크박사는 소아마비 백신 연구자였다. 소아마비는 다른 백신과 달리, 살아있는 바이러스를 투여하면 항체가 형성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급격한 바이러스 증식으로 이어졌고, 이 문제 해결에 매진하던 소크박사는 잠시 머리를 식히러 유럽에 여행을 갔다.
소크생물학연구소(Louis Kahn 1965년作) <출처:openmindgr.wordpress.com, archone.tamu.edu>
그가 어느날 방문한 곳은 이탈리아 아시시(Asisi)의 성프란체스코 수도원. 성당 안에서 그는 불현듯 영감이 떠올랐고, 귀국 후 포르말린으로 죽인 바이러스를 사용하는 안정적인 소아마비 백신을 만드는 데 성공한다. 그는 특허를 포기해 전세계 아이들의 목숨을 구해냈고, 답지한 후원금으로 연구소를 설립한다. 그가 루이스칸에게 건축을 맡기면서 가장 먼저 요구한 것은 영감이 떠올랐던 성당처럼 연구실의 천장을 높게 해달라는 거였다. 그 때문일까? 지금까지 배출한 약 2천명의 연구자 중 노벨상 수상자만 5명, 논문수가 53배 많은 하버드 대학보다 논문영향력은 3배나 높은 세계적인 연구소가 되었다.
아시시의 성프란체스코 수도원과 성당내부 <출처:www.dnartranch.com, www.udel.edu>
최근에는 실제로 천장이 높을수록 창의력 유발 호르몬이 더 많이 나온다는 게 과학적으로 증명되면서 '뉴로-아키텍처(Neuro-Architecture)'라는 신경의학과 건축학이 접목된 새로운 통섭학문이 등장하기 이른다. 건축계획의 교과서적인 각론과 상관없이 천장의 치수 하나가 인간의 보편적(선천적 혹은 절대적) 감성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건축이 사람을 바꿀 수 있다'는 (지금은 폐기된,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官 주도로 횡행하는) 근대적 계몽주의를 창고에서 다시 꺼낼 수 있는 실마리가 된다. 물론 그 때와는 전혀 다른 접근이 필요하겠지만......!
건축가가 엘리트적 입장에서 자신이 추구하는 공간을 자의적으로 설정하고, 그 곳에 거주하게 될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의 방식을 강요하는 것은 여전히 시대착오적이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건축공간의 미학과 건축가의 역할에 대한 논쟁이 시작된다. 그런데 다른 건 차치하고라도 몸에 꼭 맞는 옷처럼 인간감정에 꼭 맞는 공간이 있다는 증거 앞에서 나는 건축(공간)에도 인류 보편적으로 공유될 수 있는 뭔가가 있다는 것을 간접 확인한다.
사실 예쁜 것에 눈이 저절로 돌아가는 것처럼, 멋진 공간은 자연스레 사람을 끌어당긴다. 서울대학교의 인문대학과 공과대학은 모두 4개의 고만고만한 건물이 중정을 둘러싼 형태다. 그런데 인문대학 중정에는 항상 책읽고 담소하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반면, 공과대학 중정은 썰렁하다. 간혹 길을 잘못 든 사람이 통과하거나, 족구하는 학생들만 보일 뿐이다. 물론 공대생과 인문대생의 생활패턴이 달라서일 수도 있다. 아니면, 중정의 크기나 출입구의 위치, 조경과 편의시설 배치 등 섬세한 디테일의 차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대부분의 이용자들이 - 그들이 건축을 알건, 모르건 간에 - 논리적으로 설득할 순 없지만 그러한 공간의 분위기를 직감적으로 공유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가운데를 비웠다고 모두가 중정이 될 수 없는 이유이며, 건축을(도시공간을) 그리 간단하게 생각해선 안되는 사례가 된다.
<서울대 관악캠퍼스 배치도>
난 바르셀로나에 가면 가우디 작품보다도, 몬주익 언덕보다도 항상 먼저 찾는 곳이 있다. 바로 람블라스 광장(Las Ramblas)이다. 말이 광장이지, 까딸루나 광장에서 바르셀로나 항의 콜롬부스 기념탑에 이르는 1km의 차로 한가운데 만들어진 보행자길이다.
그런데 이 조그마한 거리엔 알 수 없는 매력이 넘친다. 아무 때고 그저 걷다보면 축제 장소에 와 있는 것처럼 기분이 들뜬다. 울창한 플라타너스 가로수가 적당한 그늘을 만들어주고 여기저기 거리의 예술가들이 자꾸 한눈을 팔게 한다. 꽃과 새와 잡지를 파는 가게들은 보행의 방해물이 아니라, 거리에 생명을 불어넣는 요소다. 이들이 내는 오색의 꽃향기와 새 지저귀는 소리, 주변 식당에서 풍기는 향긋한 냄새와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소리가 뒤엉켜 오감을 자극한다. 또한 높지 않은 주변의 고풍스런 건물들이 만들어내는 적당한 스케일, 저 멀리 보이는 지중해와 나뭇잎 사이로 눈부시게 반짝이는 햇살은 거리의 완성도를 한껏 높여준다.
람블라스 광장과 거리의 예술가들 <출처:townoldtimes.wordpress.com, pixdaus.com>
사실 차로 한가운데 보행자거리를 내는 것은 아랍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람블라스 역시 아랍어로 '시내'라는 뜻이다.(이슬람의 스페인지배 흔적일게다.) 예전에 이 곳에 시냇물이 흘렀기 때문이다. 그 아랍식의 길이 서울에도 생겼다. 바로 광화문광장이다. 그런데 같은 보행자길이라도 광화문광장을 걷는 것은 고역이다.(지금처럼 여름에는 더더욱) 그늘하나 없는 삭막함. 거리의 예술가 대신 들어찬 경찰들과 호르라기 부는 관리자들, 흡인력이라고는 전혀 없는 주변 거리, 거대한 스케일의 횡포와 보행자를 전혀 고려치 않은 디테일의 부재......나중에 광화문이 복원되면 사진찍으러 간혹 갈 수는 있겠지만, 여기에 아이들 성화에 못이겨 어른들을 강제로라도 오게 하는 이순신장군 앞 바닥분수라도 없었으면 어쩔 뻔 했을까(그나마도 차도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보이지만)......사람들의 흥미를 잃어가는 광장의 생명을 연장하려는 듯 官에서 돈들여가며 벌이는 갖가지 인위적 이벤트가 애처롭기 그지없다.
광화문광장 전경과 이순신장군앞 바닥분수 <출처:chrisinsouthkorea.blogspot.com, www.yodas.ws>
官 주도의 이벤트도, 바닥분수도 없지만 람블라스가 붐비고 편안한 이유를 무엇에서 찾아야 할까? 좋은 공간은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이 가장 먼저라는 것을 놓쳐버린, 그래서 사람들이 몰려오는 도시광장 대신 자의반 타의반 크고 작은 홍보전시물로 가득 채워버린 광화문광장......사람들이 걸어다닐 수 있게 포장을 다시 했다하여 모두가 보행자길이 될 수는 없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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