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 여행, 문화]/건축이야기

건축이야기(25)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 편안한가요?

budsmile 2008. 9. 17. 20:09


너희집 어디니?

 

대답1)저기 방죽을 쭉 따라가다 당산나무 아래 허물어져가는 초가집 옆으로 난 길에서 산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사과밭이 나오는데, 거기서 개울건너 빨간색 팔작지붕이 있는 기와집이랍니다......

 

대답2)지하철 2호선 ○○역 3번 출구에서 나와 100m쯤 길을 걷다보면 ○○마트가 나오고, 거기서 우회전하여 두 번째 블록에 삼* 래** 아파트 3단지가 있어요...거기 308동 1205호가 우리집입니다......

 

도시의 모습은 자신의 집을 찾아가는 설명도 이렇게 바꾸어 놓는다. 요즘 우리 두 명 중 한 명 이상이 살고 있다는 아파트는 격자형 도시구조와 이를 이어주는 지하철로 인해 숫자로 모든 것이 설명된다. 거기엔 ‘빨간’이나 ‘팔작지붕’ 같은 사물을 구별짓는 본래의 형태적 어휘가 개입할 여지는 별로 없다. 더 나아가 내가 의도하지도 않았는데 대형건물 간판도 광고해야 하고, 무슨 대기업 사원도 아닌데 우리집 이름이 삼*, G*, 대* 등이 된다는 것도 넌센스다.

 

이에 비례하여 우리의 미적수준도 고만고만해진다. 숫자가 중요한 시대에 형태와 독창성은 큰 가치를 갖지 못한다. 20평이건 50평이건, 서울이건 부산이건 짓는 방식도, 내부 구조도, 외관도 동일한 집들은 단지 ‘몇 동 몇 호’와 벽면에 큼지막한 건설업체 로고가 중요할 뿐이다. 고작해야 아파트 가격 올리려는 얄팍한 수로 키 큰 소나무 몇 그루와 저층부 대리석 마감재를 덕지덕지 돈들여 붙여놓고 애써 자위한다. 집이 ‘사는 곳(living place)'이 아니라 ’사는 것(something to buy)'이 되버린 현실 속에서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를 일이나, 한편으론 서글픈 생각마저 든다.

 

우리들은 2, 30만원짜리 휴대폰이나 DMB를 사면서도 디자인을 꼼꼼히 살펴보고 산다. 그런데 몇 억, 아니 몇 십억을 들여 어렵게 장만한 내 집에 대해선 의외로 무심하다. 일단 만들어지지도 않은 물건, 그냥 TV에 나오는 회사(심지어 내가 살 그 아파트도 아니다) 이미지 광고의 탤런트 얼굴을 보고 그 많은 돈을 선뜻 맡기기까지 한다. 약간의 눈속임과 값비싼 가구, 그리고 갖가지 옵션과 화려한 조명으로 가장한 엉터리 모델하우스를 한 번 둘러보면서 마취된 머리로 마치 귀신에라도 홀린 듯 청약서를 제출하고, 경쟁을 통해 뽑히고 나면 왠지 복권에 당첨된 기분이 들어 웬만해선 청약포기는 생각하기 힘들다.

 

마치 잘 짜여진 각본과도 같이 이루어지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일견 모종의 음모가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억측도 불러일으키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물건을 보지 않고도 살 수 있는 건 물건에 대한 기대치가 굉장히 낮다는 것일 수도 있다. 어차피 똑같이 만들어질 물건, 중요한 것은 입주 후에 얼마나 많은 돈을 들여 내부 인테리어와 수입가구와 수입대리석으로 치장하느냐 하는 것이고, 주변에 학원가와 역세권이 있어 향후 집값 상승에 도움이 될 수 있나를 판단하는 것이다.

 

건설회사들은 이러한 상황을 계속해서 확대재생산한다. 생산방식의 합리성과 대량공급의 사회적 필요만을 강조하여 우후죽순 들어선 아파트들이 잘 지어졌을 리가 없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배관이다. 콘크리트 수명이 보통 100년을 간다고 볼 때 매설되는 배관은 고작해야 20년 정도가 한계다. 20년이 되면 건물은 멀쩡한데 열효율도 낮아지고 누수도 된다. 1년에서 길어야 5년 정도면 웬만한 하자의 보수기간은 끝나므로 입주자가 돈을 들여 고쳐야 한다. 이때 다시 나타나는 것이 일부 건설회사들이다. 어차피 고칠 것 그냥 재건축하라고 꼬드긴다. 재건축 규제가 강하다고 아우성이다. 100년도 쓸 수 있는 집, 30년 정도만 지나면 모두 부수고 10층짜리를 30층으로 만들어준단다. 거주자들과 건설업자들은 밑천없이 가만히 앉아서 이익을 볼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문제는 30층으로 지어진 집들도 예전과 똑같은 구조로 지어졌으니, 앞으로 또 30년 후가 지나면 도대체 몇 층짜리로 재건축해야 수지가 맞을까? 그리고 언제까지......

 

집 내부 구조는 어떤가? 정말 편안한가? 현관문부터 보자. 찾아온 손님을 향해 문을 열어제끼는 것은 우리 방식이 아니다. 한옥 대문들은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안으로 문을 연다. 물론 소방상의 이유도 있고 현관을 최소화하기 위한 목적이 있지만 반복되는 사소한 행동은 우리의 의식까지 때론 굉장히 이기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현관은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가는 우리의 생활습관과 맞지도 않는다. 신발을 벗고 신을 때 대개는 손으로 벽을 짚고 어정쩡한 자세가 되기 일쑤다. 허리가 좋지 않거나 어린아이, 노인들을 위해 높은 단이나 의자처럼 앉을 수 있는 구조가 돼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욕실엔 왜 사용하지도 않는 욕조를 매번 설치하는 걸까? 서민주택까지도 무차별적으로 설치된 욕조에서 과연 한가하게 반신욕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기성 욕조는 몸을 담그고 눕기에도 앉기에도 불편하다. 또 높은 욕조는 들어가고 나오기도 불편하다. 수영장처럼 내가 걸어서 ‘들어가는’ 욕조는 왜 만들지 못하는 것일까? 구조를 조금만 바꾸면 가능할텐데......

 

창문이 시원스레 달려있는 욕실은 불가능한 걸까? 햇볕 잘 드는 곳에 욕실이 있으면 안될까? 발코니가 있는 욕실은 어떨까? 마찬가지로 창문을 통해 시원스런 조망이 가능한 주방은 어떨까? 꼭 큰 평수에서만 가능한 설계일까?

 

남향에 있는 방이 왜 천편일률적으로 안방이 되는 걸까? 실제 해가 비치는 시간동안 대부분 맞벌이인 젊은 집주인들은 집을 비우는데....대신 아이들과 부모님들에게 필요한 방이 아닐까?

 

발코니에 샷시를 설치하고 더 나아가 확장을 하는 나라는 전 세계에 우리밖에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추운 북유럽이나 러시아를 가도 발코니는 말 그대로 발코니로 사용한다. 좁은 집에 많은 식구가 사는 집은 어쩔 수 없더라도 큰 평수조차 확장하는 건 무슨 이유일까? 확장해봐야 고작 수납공간으로나 사용할 거면서......비오면 문도 못 열거면서......외부공간에선 할 일이 그렇게 없을까? 아니면 우리 스스로 외부공간을 등지도록 만드는 잠재적인 사회분위기가 있는 것일까?

 

고층주상복합이 부유층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지는 국가도 아마 우리밖에 없을 것이다. 구조적 안전, 추락, 바람의 영향으로 개폐가능한 창문이라고는 조금밖에 만들 수 없는 닭장같은 곳에서 사는 게 부유층이라니......냄새가 빠지지도 않을 것이고, 내부 소음도 공명으로 울릴 것이고, 복사열이 빠져나가지 못해 실내는 엄청 찜통일 텐데, 그리고 화재라도 나면(이건 생각도 하기 싫다)......그게 과연 집인가? 단지 내에서 모든 게 해결되고 외부와 철저히 격리되어 소통을 거부하는 왜곡된 프라이버시가 집으로서의 가치를 무시할만큼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

 

서울 곳곳을 둘러봐도 아파트 천지다. 학군이 어떻고 건설업체가 어떻고 주변 시세가 어떻고 하는 말들은 여기저기 떠도는데 정작 ‘집’에 대한 얘기는 없다. 그럴 수밖에 없다. 멋진 집이란 것을, 살기좋은 집이란 것을 구경조차, 생각조차 해보지 못한 사람들이 무엇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러한 것을 바라기엔 공장에서 찍듯이 팔아대는 것들조차 인생을 걸어야할만큼 너무 비싸져버린 게 현실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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