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 여행, 문화]/건축이야기

건축이야기(22)-모스크바엔 모스크바역이 없다?

budsmile 2008. 7. 8. 14:12

폴란드, 리투아니아를 거쳐 발트해 연안국가이자 옛 소련연방국가중 하나였던 라트비아(Latvia)의 수도 ‘리가(Riga)’에서 러시아의 모스크바로 떠나는 기차안. 4명이 사용하도록 침대 4개와 테이블이 한 단위로 구획된 컴파트먼트에 러시아 아주머니가 열 살 남짓 보이는 딸과 함께 들어왔다. 너무 많이 울어서인지 눈은 빨갛게 충혈되고 손수건으로 연신 눈물을 훔쳐내며 창 바깥의 아버지로 보이는 노인에게 손을 흔들어댔다. 옆에서 보기에도 무척이나 사연이 많을 법한 이별의 순간임에도 부인은 조그마한 꽃 몇 송이를 들고와 종이컵에 꽂아 놓았다. 아주 작은 행동이었지만, 일순 그 공간은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나는 그 마술과도 같은 변화에, 여행하는 단 몇 시간이라도 그 공간을 나만의 공간으로 만들고자 하는 여유있는 그녀의 마음씀씀이가 부러웠다. ‘공간’에 대한 인식은 평소에 드러나는 법이다. 그리고 그 인식은 그들이 살아가는 도시와 생활방식을 만들어나간다.

 

러시아에는 격변하는 역사만큼이나 수도의 지위를 놓고 경쟁하는 두 도시가 있다. 바로 ‘모스크바(Moscow)’와 ‘상트 페테르스부르크(St. Petersbourg)’이다.


모스크바하면 떠오르는 것이 바로 붉은 광장이다. ‘붉은’은 러시아에서 ‘아름다운’과 동의어이다. ‘정치’를 상징하는 크렘린을 오른쪽에 끼고 위치한 붉은 광장에는 왼쪽에 ‘시장’을 상징하는 굼백화점과 ‘종교’를 상징하는 성 바실리 성당 그리고 사회주의 시절 새로 추가된 ‘국가’를 대표하는 묘지(박제된 ‘레닌’의 시신과 스탈린 등의 명예비석이 안치된)가 한 곳에 모여있다. 높이와 비례와 색감, 그리고 기능과 상징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지독히 아름다운 공간이다. 2차 대전의 파괴와 사회주의의 가난으로 인해 몇몇 공공건물-KGB본부나 볼쇼이극장등-을 제외하고는 무미건조한 건물로 이루어진 모스크바의 여타 도시풍경과 비교하면 그 아름다움은 단연 돋보인다.

 

<바실리 성당 뒤편에서 본 붉은 광장-사진 왼편이 크렘린, 오른쪽엔 굼백화점>

 

모스크바는 사실 유럽의 변방, 내륙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는 당초 이민족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한 성벽도시로 건설되었다. 성벽은 4중으로 둘러싸였고 후에 성벽들은 철거되어 이 도시의 순환도로가 되었다. 자연스럽게 동심원 구조가 되어버린 이 도시의 특징은 시내지도나 지하철노선도를 보면 잘 드러난다. 그리고 그 동심원의 중심에 바로 ‘크렘린궁’과 ‘붉은 광장’이 있다. 마치 양궁의 과녁 한 가운데 빨간 부분처럼 그 위치가 주는 상징성은 도시설계자에게 쉽지 않은 무게로 다가갔을 것이고 결국 이렇게 장엄한 공간을 탄생시킨 것이다. 그러나 강력한 중앙집중의 도시구조는 권위적이고 폐쇄적인 느낌을 주기도 한다. 이 곳이 소비에트 연방의 수도였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모스크바 도로망 지도>

 

소비에트 연방 이전 수도는 바로 상트 페테르스부르크(우리에겐 ‘레닌그라드’로 친숙한)이다. 네바강 하류의 습하고 안개가 많은 늪지대였지만 피터대제가 낙후된 조국의 현실에 고민하며 서유럽과 가장 가까운 곳에 건설한 신도시이다. 그만큼 도시는 활기차고 유쾌하다. 도시는 르네상스와 후기 바로크양식의 건물들로 가득차고 습지를 없애기 위해 만든 인공운하는 운치를 더한다. 모스크바와 같은 나라에 있는 도시라고 믿겨지지 않을 정도다. 이 도시의 중심은 겨울궁전(지금은 세계3대 미술관 중 하나인 ‘에르미따쥬’로 사용하고 있으며 바로 앞 광장은 개혁을 요구하는 민중 수천명의 학살로 혁명의 도화선이 된 ‘피의 일요일’ 사건의 중심지다.)이다.

 

<에르미따쥬 박물관 - 예전 황제의 겨울궁전>

 

<상트 페테르스부르크의 운하와 성당>

 

겨울궁전은 그러나 모스크바의 크렘린과 그 중심의 성격이 다르다. 여기서 피터대제가 선택한 도시공간구조는 중앙집중의 동심원 구조가 아니었다. 도시는 겨울궁전을 기점으로 3개의 직선대로를 쭉 뽑아내고 성당, 해군회관 등 주요 건축물을 배치하였다. 각각의 직선대로 끝에는 기차역이 있는데, 역명은 ‘모스크바‘, ’바르샤바(폴란드 수도)‘ 등이다. 즉 그 기찻길의 종착역의 이름을 붙인 것인데 도시가 대로를 따라 기차역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기찻길로 연결된 다른 도시까지 확장된다는 의미이다(따라서 모스크바역은 모스크바에 없고 상트 페테르스부르크에 있다!). 매우 진취적이고 개방적인 도시공간구조이다. 서유럽과 다른 지역의 문물을 신속히 받아들이겠다는 포용정책이 녹아있는 도시구조인 셈이다. 그 때문일까? 옛 소련 지폐의 도안은 크렘린이지만, 현재 러시아의 지폐엔 상트 페테르스부르크가 그려져있다.

 

<겨울궁전(에르미따쥬) 앞 광장 - 여기서 도시는 시작된다>

 

<상트 페테르부르크 지도>

 

우리의 도시에도 ‘공간’에 대한 철학은 있었다. 서울은 성리학의 나라 ‘조선’의 수도답게 중국고서 ‘주례고공기’의 예에 따라 건설한 계획도시였다. 좌묘우사(왼쪽 종묘 오른쪽 사직단)는 제대로 지켜졌으나, 전조후시(앞에 관청, 뒤에 시가지)는 산이 많은 우리나라의 특징상 무시되고 대신 배산임수의 풍수지리를 살려 북악산 밑에 경복궁을 앉혔다.(주례고공기를 원칙으로 따르는 북경의 자금성은 그래서 시내중심가에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옛 한양의 도시구조는 자연스레 종묘와 사직단을 이어주는 가로로 긴 대로(종로)와 지금의 세종로사거리에서 남대문에 이르는 세로로 긴 대로(태평로)의 ‘정(丁)’자형으로 형성되었다. 이 구조는 국가의 중요한 상징물을 표현하는 우리만의 독특한 도시구조로서 전주이씨 사당 ‘경기전’이 있는 전주의 옛 도시구조에서도 볼 수 있다.

 

<한양의 지리개념도>

 

사실 옛 6조거리인 지금의 세종로(광화문∼세종로사거리)는 큰길이 아니었다. 어찌 무엄하게 임금의 거처 앞까지 큰길을 뚫을 수가 있었겠는가? 따라서 외국의 사신이나 관리들도 세종로사거리에 이르면 말에서 내려 경복궁까지 걸어와야 했다. 지금 그 길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대로이며 그것도 바로 목앞까지 차로 고속질주할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 일제는 한술 더 떠 경복궁에서 창덕궁에 이르는 율곡로를 만들어 궁궐을 완전히 고립된 섬으로 만들어버렸으며 종묘에서 창경궁과 창덕궁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끊어버렸다. 을지로, 퇴계로 등 신작로가 계속해서 만들어지면서 서울이 가지고 있던 원래의 도시구조는 완전히 망가지게 된 것이다.


이에 반해 정조시대 새로 조성된 신도시 ‘화성(수원)’의 도시공간구조는 개념부터가 완전히 다르다. ‘토지’에 기반한 노론세력에 대항해 ‘상업’에 기반한 실학세력을 자신의 지지세력으로 새로이 구축하려 했던 정조는 배후도시로 화성을 설계했는데 그 공간구조로 사통팔달이 가능한 ‘+’형을 선택한 것은 자연스런 일일지도 모른다. 이는 근대 상업도시로 이름을 떨친 도시들에는 공통된 공간구조인데 금강 하류에 위치한 ‘강경’은 그 대표적인 예다.

 

<수원 화성>

 


지금 우리가 설계하는 도시들은 어떨까? 분당, 일산, 평촌, 중동......모든 신도시는 하나같이 격자형 도시구조를 띈다. 로마시대 이래로 가장 효율적이고 빠르며 자본주의적이고 감시(관리)가 쉬운 그러나 몰개성적이며 차량중심적인 구조. ‘구조’가 그 도시의 철학과 공간에 대한 인식을 보여준다면 적어도 우리의 신도시들은 모두 같은 목적을 가진 것임에 틀림없다. 그 목적이 무엇이었을까? 자고 일어나면 도시 하나 만드는 게 일도 아닌 지금, 우리는 도시를 너무 쉽게 생각하며 지도위에 선을 쭉쭉 그어버리는 건 아닐까? 서울의 공간구조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며 일제가 만든 율곡로를 알면서도 원상복구할 수 없는 것이 바로 ‘도시’가 아니던가...... (2006.6.2)

 

 

free count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