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 여행, 문화]/건축이야기

건축이야기(21)-건축공간의 비밀(8) : 건축과 장식

budsmile 2008. 7. 8. 09:50

혼자 여행을 하면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때론 사기꾼을 만나 고생도 하지만, 아무런 이해관계없이 만날 수 있는 현지인들의 마음씀씀이에 여행의 피곤함은 눈녹듯 흘러내리기도 한다. 가난하고 말은 안통해도 사람사는 세상 어디건 사람들이 희로애락에 대해 느끼는 건 똑같다. 다만, 오랜 세월동안 적응해온 관습과 신앙만이 다를 뿐......

 

혼자서 고생하는 여행자에게는 요금을 받을 수 없다며 손사레를 치던 파키스탄 라호르의 택시기사 아저씨, 출근길 뉴델리의 만원 시내버스에서 나에게 자리를 양보하며 기어이 자리에 앉힌 인도 할아버지(어찌나 민망했던지...), 아침식사하러 가면 알아서 계란과 만두와 쌀죽을 내주며 어젠 왜 안왔느냐며 호통치고 웃던 티벳 라사의 식당주인 아저씨, 흡연실의 야간열차 컴파트먼트(방으로 된 기차간)에서 잠자라며 밖에 나가 담배를 피던 이태리 시칠리아 가족들......결국 그날 친하게 된 우리들은 밤새 노래부르며 그분들이 가지고 가던 두 동이의 술을 모두 비워버렸다......라오스의 고도, 루앙프라방에 즐비한 사원입구에 갑자기 나타난 노스님이 마침 큰 길을 혼자 지나가던 나에게 씩 웃으며 두손으로 말없이 건네주던 잘익은 망고 하나......너무 익은 나머지 배를 드러내며 나무에서 떨어진 망고를 노승이 누군가라도 먹게 할 요량으로 줍자마자 헐레벌떡 가지고 나온 것이리라......

 

태양이 뜨거운 한낮, 다리가 아파 잠시 쉬고 있던 나에게 바로 앞 빵집 주인이 따끈한 빵 한아름과 시원한 청량음료를 건네주고 갔다.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제대로 고맙다는 인사 한마디 못 건넸다. 왜 주었는지 이유를 찾는 것은 남에게서 이유없이 관심을 받는 것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일거다. 그냥 거기에도 나와 같이 느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고, 그래서 홀로 하는 여행도 외롭지 않다. 그곳이 바로 마케도니아다. 유고슬라비아에서 독립한 신생국이며 최근에는 코소보사태로 내전까지 겪은 나라다. 아직 우리와 국교수립이 되어 있지 않지만, 여기엔 멋진 ‘오흐리드 호수’가 있다. 바이칼 호수처럼 지반침하로 형성된 호수는 유네스코 지정 세계자연유산이자 문화유산이다. 이 곳이 문화유산인 것은 주변의 교회들 때문이다. 기독교가 유럽에 처음 전파된 곳이자 초기 정교회의 소박하지만 아름다운 교회양식을 많이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오흐리드 호수와 호수변의 초기 기독교 교회>

 

정교회가 카톨릭과 양식상 다른 것은 바로 성상의 차이에 있다. 성상숭배를 하지 않는 정교회는 대신 이콘(Icon, 아이콘)이라 부르는 성화로 성당을 장식한다. 사제들의 계급도 엄격하지 않아서 미사는 집전하는 신부가 지도자로서 신도들에게 말씀을 전달하는 일방향 방식이 아니라, 한데 모인 신도들의 기도를 신부가 보조해주는 역할을 해준다. 이러한 행태는 건축물 형태에도 그대로 묻어난다. 즉, 카톨릭 교회는 십자가형 중앙에 연단이 있고 이를 바라보며 신도들이 일렬로 앉아 있지만, 정교회는 그냥 방향성이 없는 대공간만이 제공될 뿐이다.

 

1453년 오스만투르크가 동로마의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을 함락하면서 그 유명한 소피아성당을 파괴하지 않고 남겨놓은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성상을 숭배하지도 않고 사제의 계급을 인정하지 않는 이슬람 교리가 정교회 교리에 충실한 중앙집중식의 이 성당구조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마케도니아의 초기 교회에서 발전한 비잔틴의 중앙집중식 공간은 성소피아성당을 지나 구조적으로 완벽하게 대공간을 구사할 수 있게 되었으며, 결국 모스크바의 성 바실리 성당에서 양식상 최고조에 이른다. 이 성당은 겉으로 보기에 중앙집중식으로 읽히지 않는다. 하나의 대공간에 붙어있는 8개의 보조공간에 형성된 돔이 고유의 문양과 독특한 색채로 크기까지 서로 다르게 처리되고 있기 때문이다. 중앙집중식의 평면이 가지는 단조로움을 장식의 적정한 사용으로 세련되게 처리한 것이다.

 

 

 <성 바실리 성당, 모스크바>

 

장식은 그냥 쓸데없이 군더더기처럼 붙여놓은 이물질이 아니다. 우리가 흔히 고딕성당이라 하면 뾰족뾰족한 것을 먼저 떠올린다. 이전 양식과는 뭔가 다르게 처리하기 위하여, 혹은 하늘에 다다르기 위한 열망으로 뾰족한 것을 장식으로 만들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뾰족한 것의 실체는 순전히 구조적인 목적에서 나왔다. 높은 건물을 만들려다보니 실내를 가벼운 비내력벽(하중을 받지 않는 벽)으로 하게 되었고, 실제 하중은 이 비내력벽을 바깥에서 지지하고 있는 두꺼운 내력벽(일명 '플라잉 버트레스(flying butress)')으로 해결하는 시스템을 개발해 낸 것이다. 실내에 얇은 비내력벽이 생기자 창을 마음대로 뚫을 수 있게 되어 스테인드글라스라는 ‘장식’이 생겼으며, 바깥의 내력벽은 좀 더 무겁게 만들기 위해 그 위에 ‘하중첨가용’으로 뾰족하게 생긴 ‘장식’을 부가한 것이다.

 

<고딕구조 모식도와 노트르담 성당 뒷부분 - 얇은 비내력벽을 바깥에서 받치고 있는 육중한 내력벽>

 

 

그러나 서양에서 양식상의 발전이 바로크를 기점으로 잠시 멈춘 19세기, 그들은 다시 예전 양식들을 리바이벌하기 시작했다. 그리스 양식을 추종하는 신고전주의, 고딕양식을 추종하는 낭만주의 등이 그것이다. 바로 이 낭만주의의 대표주자라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영국의 국회의사당이다. 하지만 이 건축물에는 장식의 당위성이 없다. 그저 고딕흉내를 내기 위해 뾰족한 것들을 아무런 이유없이 갖다 붙여놨을 뿐이다. 근대 건축이 태동하기 전까지 장식은 항상 이런 식으로 건축물에 ‘첨가’되었다. 

 

<영국 국회의사당>

 

장식이 구조와 공간으로부터 유리되는 것이 극에 달하면서 중세까지 이어져 온 ‘공간’에 대한 진지한 탐구도 다시 시작되었다. ‘아르누보’시대 아돌프 로스(Adolf Loos)는 심지어 ‘장식은 죄악이다’라는 말을 남기며 오스트리아 빈 시내 한복판에 장식을 모두 없앤 건물을 세워놓았다. 이 건축물에 대한 비엔나 시민들의 반응은 에펠탑을 보는 파리시민의 혐오감 이상이었다고 한다.

 

<아돌프 로스가 설계한 비엔나 구시가의 백화점 건물>

 

장식이 사라진 건물은 골조미를 드러내며 새로운 공간가능성을 열었고, 이는 곧바로 근대건축으로 이어졌다. 근대건축은 장식이 아닌 ‘구조 그 자체’를 통해 여러 가지 공간 실험을 하며 발전했다. 그러나 장식이 사라진 건물은 시대나 장소와 상관없는 중립적인 건물이 되었고, 여기엔 ‘인터내셔널 스타일’이란 명칭도 붙었다. 후기 자본주의 시대 이 모더니즘 양식은 대량생산이라는 시대조류에 편승해 전세계에 급속도로 번져갔고, 6ㆍ25이후 조국재건의 사활이 걸린 우리에게 이는 가장 빠르게 주택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 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 우리는 근대건축이 지향하던 ‘구조적 장식미’는 사라지고 오로지 대량생산에 초점을 맞춘 박스형 건물만을 우리는 받아들였다. 아니, 우리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자본의 논리에 곡해된 모더니즘의 공해에 시달렸다. 그러자 다시 ‘장식’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유럽에서는 공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주장하는 ‘후기 모더니즘’ 또는 ‘해체주의’가, 인도와 멕시코같은 제3세계에서는 고유 전통의 새로운 해석을 모더니즘에 접목시키는 ‘풍토주의’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동 시기 미국에서는 ‘포스트 모더니즘’이 등장한다. 세계의 자본을 지배하나 전통이 일천한 미국은 장식이 사라진 깨끗한 건물에 붙일 자신들만의 정체성으로 당연히 ‘상업성’을 택했다. 관공서는 주민들에게 선물이 되어야 한다며 시청사 건물에 리본을 붙인 ‘포틀랜드 시청사’는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의 효시가 되는 건물이다.(설계자 마이클 그레이브스는 한 때 덕수궁옆 새 미국대사관 설계자로 지명된 바 있다.) 돈이 된다면 유럽의 전통양식도 예외는 아니었다. 마치 그리스 아크로폴리스의 에렉티온 신전을 패러디한 것처럼 보이는 디즈니 본사 사옥은 우스꽝스럽지만 미국만의 스타일을 잘 표현해냈다.

 

<포틀랜드 시청사, 미국 포틀랜드, 마이클 그레이브스 作, 1980>

 

<디즈니 본사, 마이클 크레이브스 作, 1990>

 

예술품은 작가가 그리고자 하는 세계, 그리고 그 뒤에 숨겨진 창작의 고뇌를 이해하려 들지 않는 순간 ‘키치’가 된다. 재력가의 사회적 지위를 위해 거실 벽면을 채우는 장식이 된다면 피카소의 그림도 한낱 허접한 쓰레기일 뿐이다. 미국의 포스트모더니즘은 비록 유럽의 고전장식을 상업적으로 번안한 것이었지만, 거기엔 자신들만의 스타일로 재창조해내려는 철학과 노력이 있었다. 그래서 미국적인 장식이 탄생한 것이며, 이는 피자헛, 맥도널드와 같은 상업건물을 통해 전 세계로 전파되어 알게 모르게 우리의 삶 깊숙이 들어왔다.

 

우리의 도시는 어떨까? 박스형 건물만이 즐비한 도시는 장식이라곤 콘크리트 박스 위에 필요도 없는 기와지붕을 얹던가 간판으로 벽면을 온통 도배하거나 둘 중의 하나다. 또 아파트 모델하우스에다가는 얇은 합판 몇 장 겹쳐 서양의 고전양식(특히 고딕양식)을 아무 거리낌없이 베끼고 또 베낀다. 예전에는 놀이동산에서나 볼 수 있었지만 이젠 백화점, 예식장, 러브호텔, 교회의 표준양식이 되어버렸다. 아무런 생각없이 베낀것도 문제지만, 제대로 베끼지도 못한 고전양식들로 인해 도시는 고풍스러워지기는 커녕 마치 전체가 놀이동산화되는 느낌이다. 우리의 민족성과 지역성을 나타낼 수 있는 장식을 찾는 것은 기대도 하지 못한다. 모더니즘 건축이 수입될 때 그 ‘구조적 장식성’에 대한 고민은 사라지고 오로지 ‘더 빨리 더 많이’만을 보았던 것처럼, 현재의 우리들은 포스트 모더니즘 건축에서 상업성만을 취한다. 다음엔 또 어떤 장식을 수입하여 벽면에 덕지덕지 붙일 것인가? 언제까지...... (2006.3.17)

 

<고딕양식의 놀이동산 및 비잔틴양식의 모텔 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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