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권에 이르는 결코 적지 않은 분량의 책이었다. 하지만 정말 단숨에 읽어내려갔다. 저자의 평이하면서도 간결한 문체도 좋았지만, 십자군과 아랍권이 만들어내는 역사의 한 시기가 스펙터클하게 내 머릿속을 요동치게 했던 탓이다. 서양의 삼국지라 할만한 서사구조와 영웅들의 의리와 모험담, 종교와 권력으로 얽힌 세상의 단면을 보는 재미는 어떤 영화보다도 쏠쏠했다.
그러나 당시 인간들이 저질렀던 (어찌보면 어처구니없었던) 행동들이 어쩌면 그렇게 700년 이상이 흐른 지금도 똑같이 반복되고 있는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과연 인간의 역사에 발전이란 게 있는 것인지......그저 달라진 물리적 환경에 맞춰 어리석은 짓을 업그레이드해가며 저질러대고 있는 듯하다는 생각이다.
1. 십자군은 이슬람에 정복당한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한 종교군대였다. 하지만 당시 예루살렘에는 이슬람의 용인하에 기독교도들도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었고, 서양인들의 순례여행도 아무런 방해없이(물론 약간의 돈을 지불해야하는 것만 빼놓고는)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웬 십자군 전쟁인가?
십자군은 예루살렘 탈환이라는 종교적 포장으로 위장되었지만, 사실은 이를 빌미로 서유럽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하는 교황권력에 의해 시작되었다. 모든 발단은 '카노사의 굴욕'(1077년)이라 알려진 사건에서부터 시작한다.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스물일곱의 하인리히가 젊은 혈기로 교황의 의견을 무시한 인사를 단행하다가 파문에 처해지고, 황제는 이를 풀기위해 교황이 거처하던 카노사성에서 눈속에 맨발로 참회를 한 것이다. 이후 굴욕을 당한 황제는 교황을 로마에서 쫓아낼 만큼 철저히 따돌렸고 교황의 권위는 철저히 무너져내렸다. 1077년 사건의 당사자, 그레고리우스에 이어 새로 교황이 된 우르바누스2세는 이 상황을 타개할 묘책을 1095년 개최된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주창한다. 바로 십자군이다......황제는 없고, 교황만 있는 권위, 곧 신의 명령을 빌어 그리스도교도들이 이교도와 일전을 벌일 것을 요구한다. '신이 그것을 바라신다'는 함성이 군중들의 머리에 새겨졌고, 그 이듬해 1차 십자군들은 중동으로 출발하게 된다.
어찌보면 말도 안되는, 하지만 감성을 자극하는 대의명분은 모든 사리판단과 이성과 합리적 논의를 일거에 잠재우고 모든 사람들의 머리에 욕망이 되어 채워진다. 성패에 따라 그걸 시대정신이라 부를 수도 있고, 포퓰리즘의 대중선동이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소수에 의한 권력독점 의지가 숨겨져 있으니, 결국 그 권력놀음을 위해 목숨과 재산과 가족을 바쳐야 하는 것은 포장된 대의명분에 현혹된 어리석은 자들이다......(하지만 그들이 권력의 똘마니들로서 멍청하게 의미없이 죽었다는 것은 순전히 나의 개인적 소견이다. 정작 자신들은 역사를 바로 세우고,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아주 명예롭게 자신을 바쳤다는 자부심으로 행복해하며 죽었을 것이다. 그리고 권력은 그런 그들을 영웅이라며 다시 치켜올려주게 되어 있다. 하지만 누구의 영웅이지? 권력자들의 권력을 지켜준 대가로 받은 영웅칭호겠지(그것도 죽은 다음에).....자신의 삶을 완성한 진정한 영웅이 아니라......쯧......!)
1차에서 8차에 이르는 십자군 중 6차를 제외하고는 하나같이 이 교황의 권력놀음에 충실히 보답한다. 그로써 자신들은 교황이 약속한(그 약속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도 나는 이해못하겠지만!) 사후의 면죄부를 받았다고 생각했겠지만, 그건 하나뿐인 목숨을 바칠 수 있도록 조건을 만들어 준 것일 뿐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700년 이상이 흐른 지금, 우리는 그 때 사람들보다 더 많이 배우고 영악해졌기 때문에 그런 어리석은 선동에 속는 일이 다시는 없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내가 보기엔 '전혀 아니다.'
히틀러는 독재권력을 위해 게르만우월주의를 내세워 독일인 8000만명을 속였고, 미국은 자국의 싼 석유값 유지와 국제패권을 위해 대량살상무기라는 허위 사실로 3억명 이상의 미국인을 속이며 이라크의 어린이를 포함한 4만명 이상의 민간인을 죽였다. 인도는 윤회사상을 갖다 붙여 12억명을 카스트에 묶어 놨고, 북한은 주체사상을 통해 2천만명을 '배고픔도 잊게 만드는' 특이한 국가로 만들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불행히도 국가주의적 사고가 개인의 행복보다 중요하다고 배운 우리들도 '북한'과 '일본' 얘기만 나오면 누구나 이유불문하고 민족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마치 자신이 애국자임을 타인에게 굳이 증명이라도 해야만 하는 것처럼, 바로 전장에라도 출전할 태세로 자신의 한 목숨 기꺼이 바치겠노라 입에 거품을 문다. 이런 상황에선 그것이 가진 담론으로서의 가치는 무의미해진다. 문제는 그게 옳고 그른지조차 논의할 수 있는 최소한의 합리성이 거세되어버린 사회다. 논의 자체가 신성모독처럼 여겨지는, 절대善이 되어버린 명제......하지만 그 명제는 시대정신이기 앞서, 제대로만 걸리면 누구나 우리를 꼭두각시처럼 조정하고 지배할 수 있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르게 만들어버리는 도구가 될 수 있다.
잭팟이 터지길 기다리는 도박꾼들처럼, 정치인들도 여러 명제를 들고 나와 들이대며, 국민들이 아무런 이의제기 없이 그 중 하나를 덥썩 물기만을 바란다.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생각없이 무느냐에 따라 권력의 승자가 정해지고, 명제가 갖는 절대성은 절대권력으로 변해 우리의 목을 조른다. 그러기에 절대善(神)을 빙자해 하나의 생각과 하나의 사상만을 강요하는 권력을 경계해야 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걸 극복한 의지가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울 때가 많다. 니체의 말을 빌어, 잠재된 '노예근성'은 오히려 절대권력의 대리만족을 통해, 절대명제를 자신 삶의 목표로 쉽사리 치환해버리고는 기꺼이 노예가 되기를 자청한다. '믿음'만큼 쉬운 게 없으니까......복잡한 세상에서 복잡한 결정을 내리기 위해 자신을 단련하여 삶의 주체로 나서기보다, 그 '믿음'을 통해 자신의 생각과 행동의 모든 준거를 단순화하는게 얼마나 쉽고 편리한가! 그것이 인간의 한계이고, 깨달은 자에게는 새로운 도전이 될 것이다.
<십자군 이동경로, 출처: islamproject.org>
2. 1차 십자군은 왕들이 제외된 채 고드프루아, 탄크레디, 보두앵 등 쟁쟁한 스타 제후들로 이루어졌다. 그들은 비잔틴제국을 경유해 에데사, 안티오키아 등 주요 요충지를 차례로 점령하며 마침내 예루살렘 일대를 손에 넣었고(1099년), 십자군 국가시대를 열었다. 제후들의 뛰어난 전략과 이슬람의 분열이 그것을 가능케 한 것이다. 그리고 향후 지배기간을 확립하는 18년간 부족한 병력을 새롭게 만들어진 템플기사단과 요한기사단이 보충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후 이슬람에 강력한 지도자가 등장하게 된다. 첫번째 주자는 에데사를 함락한 '장기',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아들 '누레딘'은 2차 십자군을 대파한다. 2차 십자군은 프랑스왕 루이7세와 신성로마제국의 콘라트3세가 이끌었다. 하지만 전략도 없는 이들 십자군은 다마스커스 공방전에서 전투 나흘만에 도망치고 만다.
2차 십자군을 패퇴시킨 후 한껏 고양된 이슬람 세계에서는 그 유명한 '살라딘'이 등장해 카이로와 다마스커스를 중심으로 나뉜 시아파와 수니파를 통합한다. 살라딘은 여세를 몰아 지하드(성전)을 선포하고 하틴전투를 계기로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데 성공한다.(1187년) 용맹을 떨치던 예루살렘의 문둥병 왕 보두앵4세가 죽은지 2년만이었다. 이제 십자군 국가는 안티오키아와 트리폴리, 티루스로 쪼그라들었다. 다급해진 유럽인들은 3차 십자군을 꾸렸다. 영국왕 리처드(사자심왕으로 유명한)와 프랑스왕 필리프2세, 신성로마제국황제 프리드리히 1세가 그 주역이었다. 그러나 가장 강력한 군대를 이끌었던 프리드리히 1세는 중동에 발도 들여놓지 못하고 강물에 빠져 익사하고 만다.(그리고 그의 군대는 '튜턴기사단'으로 재탄생한다) 당시 십자군 국가들은 티루스를 기점으로 아코에서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키프로스를 정복한 리처드는 특유의 리더십과 카리스마로 필리프 2세와 공방전에 합류해 아코 함락에 성공한다. 그런데 아코탈환 직후 필리프2세는 귀국해버렸는데(교활한 그는 리처드와 앙숙관계로, 귀국은 그가 전장에 있는 사이 리처드의 영토를 뺏기 위함이었다) 덕분에 리처드와 살라딘의 유명한 대결이 이루어졌다. 두 사람 모두 용맹하면서도 잔인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전략가였지만 때론 타협도 할 줄 아는 부드러움을 겸비한 남자들이었다. 덕분에 밀고 당기는 지리한 싸움 와중에 강화협상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결국 협상을 통해 리처드는 이슬람측의 예루살렘 지배를 인정하되 순례자들의 안전과 자유를 보장받고, 대신 지중해 항구도시 대부분은 십자군 영토로 인정받게 된다. 이후 살라딘은 병으로 죽었지만(1193년) 그 강화로 인한 평화는 향후 26년동안이나 이어졌다.
<영국국회의사당의 리처드왕 동상(출처: ancientdigger.com)과 살라딘 초상(출처: en.wikipedia.org)>
이시기 교황으로 선출된 인노켄티우스 3세는 예루살렘이 이슬람 수중에 있다는 것에 불만을 품고 새로운 십자군 창설을 주도한다. 교황은 1차 때와 같이 제후들로 4차 십자군을 구성하기로 하고 베네치아의 해군력을 활용키로 한다.(그러나 이 시기 살라딘의 뒤를 이어 권력을 잡은 그의 동생 '알아딜'은 베네치아와 비밀동맹을 맺고 있었다. 베네치아로서는 3차 십자군에서 리처드에 협력해 이지역 상권을 주도하고 있는 경쟁국 피사와 제노바를 따돌리기 원했다) 베네치아의 도제 단돌로는 4차 십자군을 자신의 국력을 확대하는 계기로 활용했다. 덕분에 4차 십자군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베네치아는 자금이 부족했던 4차 십자군의 약점을 잡고 발칸의 자라 지역 공략을 종용했다. 그리스정교회이긴 했지만 같은 그리스도교 국가를 공략하는데 4차 십자군을 활용한 것이다. 또한 비잔틴제국의 내분을 이용해 콘스탄티노플까지 함락하고 크레타를 비롯한 주변 섬들의 지배권을 확립해 지중해 패권을 장악한다.(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라 했던가......결국 4차 십자군은 팔레스타인에는 발도 들여놓지 못하고 끝나버렸다!)
<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함락, 출처: anirishtory.wordpress.com>
인노켄티우스 3세를 이어 교황에 오른 호노리우스 3세 역시 십자군에 미련이 있었다. 그는 유럽 왕과 제후들을 모으는 데 실패하여 결국 중근동의 그리스도교로 구성된 5차 십자군을 구성한다. 준비도 충분하지 않고 지도자도 없는 상태에서 교황특사까지 파견돼 교황청의 입김이 어느 때보다 센 십자군이었다. 공격목표는 '알아딜'의 뒤를 이은 아들 '알카밀'이 지배하던 이집트의 다미에타 지역이었다. 알아딜 사후 혼란해진 이슬람 세계 덕분에 승기는 십자군이 먼저 잡았다. 다급한 이슬람측에서는 예루살렘을 넘겨주겠다는 파격적인 두 번의 강화조건을 내세웠지만, 교황특사가 반대했다. 협상이 아니라 피를 흘려 탈환해야 한다는 명목이었다. 그러나 이후 전열을 정비한 이슬람측은 나일강 상류의 댐을 폭파해 다미에타를 물바다로 만들어버렸고, 5차 십자군은 완벽한 패배로 끝나게 된다.(이를 통해 십자군 목적이 예루살렘 탈환보다는 교황에 대한 충성테스트 성격을 띄고 있음을 확연히 알 수 있게 된다.)
6차 십자군의 주역은 단연코 신성로마제국황제 프리드리히 2세였다. 그는 십자군 서약을 조건으로 교황청이 황제로 인정해주었지만, 그는 교황이나 기독교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우선 그는 아랍인들을 능력에 관계없이 중용하고 우대하며, 다양한 학문을 후원하는 정책을 펼쳐 교황의 눈밖에 났다. 교황의 거듭된 십자군 출항 채근에도 불구하고 그는 느긋하게 시간을 끌며 내부적으로는 알카밀과 비밀협상을 진행하였다. 십자군이 오지 않기를 바랬던 알카밀과 예루살렘을 평화적으로 양도받는 협상이 무르익고 있을 무렵,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는 출항을 미루고 있는 프리드리히를 파문에 처한다. 헌데 파문에도 불구하고 교황에게 즉시 용서를 구하러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두 번째 파문에 또 처해졌다. 프리드리히는 눈도 꿈쩍하지 않았는데, 그에 대한 국민들의 탄탄한 지지때문이었을 게다. 암튼 그 사이 알카밀은 이슬람을 다시 통합해 강력해졌고, 협상의 필요성은 약해졌다. 프리드리히는 드디어 6차 십자군을 이끌고 아코에 도착하는데, 도착즉시 알카밀에 다시 강화를 요청한다.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결국 수차례의 평화교섭 끝에 예루살렘(동측 이슬람 지구를 제외한)을 십자군 영토로 획득했다.(1229년) 하지만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타협으로 획득한 평화와 영토는 굴욕이라는게 교황청이 끝까지 고수한 공식 입장이었다.(나중에 교황과 황제는 공식적으로는 화해하였다)
<프리드리히와 협상중인 알아딜/알카밀, 출처: en.wikipedia.org>
이 때 마련된 평화는 1248년 프랑스 루이9세가 이끈 7차 십자군때문에 깨지고 만다. 물론 1244년 시리아의 한 부족이 예루살렘을 점령해버리는 일이 발생하자, 자연스레 십자군 논의가 다시 일어났지만, 카톨릭계의 모범생 루이 9세는 십자군을 자발적으로 결성한다. 그는 5차 십자군이 실패했던 이집트 다미에타를 다시 공략하였지만, 전략같은 것은 아예 없었다. 결국 7차 십자군은 이슬람에 엄청난 대패를 당하고 그마저 포로로 잡혀버리고 말았다. 그는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나왔지만, 7차 십자군이 남긴 후유증은 이 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싸웠던 이집트의 맘루크들은 한껏 기세가 올라 살라딘의 아이유브 왕조를 무너뜨리고 이집트를 직접 통치하였던 것이다. 노예출신인 맘루크들은 타협이라고는 할 줄 모르는 전사집단이었다. 결국 이제는 그나마 남은 십자군 국가마저도 군사적 공황상태로 만들어놓은 것이 7차 십자군의 가장 큰 폐해였다.(그는 추후 다시 8차 십자군을 꾸려 이번엔 튀니지를 공격하지만 그것 역시 실패로 돌아갔고, 결국 맘루크들이 1291년 마지막 남은 십자군 도시 '아코'를 점령하면서 십자군 시대는 종말을 고하게 된다.)
<프랑스왕 '성왕' 루이9세, 출처: en.wikipedia.org>
3. 재미있지 않은가? 교황청은 두 번의 연이은 대패와 이로 인해 국제정세를 흔들어버리고 결국 십자군 국가를 소멸시킨 루이 9세에게 문책은 커녕 후에 '성인'의 칭호를 붙여주었다. 반면에 평화적인 방법으로 원하던 예루살렘을 다시 탈환했던 프리드리히에게는 파문의 벌을 내려주었다. 어찌보면 교황청이 원했던 것은 예루살렘 탈환도, 순례자들을 위한 안전보장과 십자군 국가의 안녕과 지역의 평화도 아니었다. 그들은 오히려 전쟁을 원했고, 이를 위해 맹목적인 적대감과 충성심을 요구하였다. '성왕' 루이라고? 그저 신심하나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사람이 성왕이라고? 결국 성왕이란 칭호는 교황을 위한 애완견 정도의 의미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름없이 목숨을 내놓아야 했던 사람들은 오늘도 프리드리히의 업적을 폄훼하고 이슬람에 대한 증오를 불살으며, 성인이 된 루이를 칭송하고 교황과 그를 위해 기도할 것이다. 평화를 향한 길은 그래서 아이러니하다.
권력 유지를 위해 전쟁을 부추기는 세력은 그 당위성을 종교로, 애국심으로 포장하고, 권력을 위해 희생당한(하지만 겉으로는 적에 의해 희생된) 사람을 영웅이라 칭하며 본보기로 삼으려 할 것이다. 반대로 평화를 갈구하는 세력에게는 '적에 대한 굴욕'이라느니 '적에 대한 맹목적 추종자'라는 낙인을 찍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이 진정 평화를 이루는 길이고, 무엇이 나와 내 가족을 지키는 것인지, 전쟁만이 문제해결의 최선인지, 전쟁에 숨은 다른 꼼수는 없는 것인지 판단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 각자의 몫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나는 그게 십자군 전쟁이 주는 교훈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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