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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절(7) - 영주 부석사

budsmile 2012. 6. 7. 18:00

 

 

부석사......대부분의 건축가들이 남한 제일의 건축으로 뽑는 아름다운 절이다. 굳이 그런 편견을 가지고 오지 않더라도 천왕문에 들어서는 순간, 느껴지는 짜임새있는 가람배치와 건축적 장치, 그리고 안양루와 무량수전을 거쳐 조사당에 이르기까지 주변의 자연을 건축으로 끌어들이는 수법 등이 예사롭지 않음을 문외한이라도 금방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냥 아름답다는 말로는 부족한, 故 최순우 선생 말씀마따나 '사무치게' 아름다운 모습에 반해 유홍준 선생처럼 보고 또 봐도 또 그리워지는 절집이 아닌가 싶다.  

 

나도 10년만에 다시 찾았다. 그간 많은 불사가 있었던 듯 싶다. 하지만 기본골격은 건드리지 않아 고려시대 이후로 내려오는 옛절의 정취를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다만, 현재 절 입구에 복원된 천왕문은 사실 예전 일주문이 있던 자리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 아래쪽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당간지주가 있기 때문이다. 현재는 당간지주보다도 더 아래쪽에 일주문을 세워놨는데 절의 영역을 확장해보고자 하는 세속적 욕심때문이리라...... 

 

 

부석사는 크게 3부분으로 나뉜다. 천왕문(옛 일주문)에서 범종각에 이르는 1권역, 범종루에서 안양루를 거쳐 무량수전에 이르는 2권역, 그리고 무량수전 동측에 위치한 3층 석탑을 끼고 돌아 조사당에 이르는 3권역이 그것인데, 각 권역은 너무나 극명한 특징과 서로 다른 분위기를 가지며 유기적으로 통합되어 있다. '여럿이 결국은 하나를 구성'한다는 의상의 화엄사상이 구현된 것이라고나 할까......

 

이제 부석사에 들어간다.

 

들어가기 앞서, 부석사의 감동이 시간의 흐름에 잊혀질 게 두려워 내 나름대로 수학공식처럼 외우기 싶게 만든 부석사 7경을 위주로 설명해볼까 한다.(정말 내 마음대로 선정한 것이니 그냥 참고만 하시길......)

 

이제 진짜 들어간다......^^

 

당초 천왕문이 있었으리라 생각되는 곳(현재도 건물이 들어서있지만, 내부는 텅 비어있는 상태다)에서 예전 일주문 자리(현재의 천왕문)을 내려다본다. 잘 정비된 돌계단들이 인공의 절제된 멋을 통해 순례객들을 이끈다.

 

<천왕문 자리에서 현재의 천왕문(옛 일주문 자리)를 바라보다>

 

이제 당초 천왕문이 있었으리라 생각되는 곳에서 북쪽을 바라보며 절의 깊숙한 곳을 향한다. 역시 인공의 돌계단이 이어지며 범종루로 향한다. 범종루는 참 특이한 건물인데, 한옥의 측면을 파사드(주된 정면)로 사용한 우리나라에선 흔치 않은 사례이기 때문이다. 아마 여긴 목적지가 아니라 '통로'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이러한 방향성은 팔작지붕의 박공면을 통해 더욱더 강조된다.(실제 범종루의 사진 반대편 지붕은 팔작지붕이 아니라 맞배지붕으로 마무리되어 있다. 맞배지붕은 방향성보다는 완결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는데, 범종루를 통과하면 이제 부석사의 가장 신성한 성소에 들어섰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한 건축물에 2가지의 지붕을 혼용해서 사용한 것은 그러한 공간감을 시각적으로 풀어낸 건축가의 재치있는 파격인데, 그 깊은 의미를 지닌 범종루가 부석사 제1 절경이다.

 

<천왕문자리에서 범종루를 바라보다>

 

범종루로 올라가기 전, 돌계단 양옆으로 한 쌍의 3층 석탑이 대칭되게 놓여있다. 본래 부석사의 것은 아니고, 인근 폐사지에서 이전해온 것이라 한다.

 

<돌계단 우측에 있는 3층석탑>

 

돌계단 왼쪽으로는 요사채가 있다.

 

<요사채 방향을 보다>

 

이제 돌계단을 올라 범종루를 통과한다. 범종루는 2층의 누각으로 순례객들은 이 1층의 필로티를 통과해 1.5층에 해당하는 단으로 올라설 수 있다. 어둠과 빛의 완벽한 대비, 그리고 표지판이 없어도 사람을 자연스레 이끄는 힘......

 

<범종루 1층에서 빛으로 가득찬 안양루 쪽을 바라보다>

 

범종루 계단이 놓인 공간에서는 저 멀리 안양루가 지금까지 올라온 길의 축을 30도 비튼 얼짱 자세로 반기게 된다. 이날은 석가탄신일 준비로 인해 범종루와 안양루 사이 공간을 온통 연등이 덮어버리면서 이 광경을 볼 수는 없었다. 다만, 이 때 어디선가 홀연히 나타난 두 분의 승려가 꼭 내 마음을 아는 듯 팔을 들어 안양루의 위치를 가르켜줬다......어두운 범종루 아래에서 쏟아지는 빛을 따라 계단이 향하는 곳에 시선을 옮기는 순간 마술처럼 눈 속으로 들어오는 안양루의 모습이 부석사 제2 절경이다.

 

<범종루 1층에서 안양루 쪽을 바라보다>

 

범종루 밑에서 나와 2층 누마루를 바라보다. 목어와 법고가 눈에 띈다.

 

<범종루의 2층 루 모습, 석가탄신일이라 뭔가 접수를 받는 듯했다>

 

<범종루에 걸린 법고와 목어>

 

여기서부터는 이제 2권역의 시작이다. 범종루를 나오는 순간 보이는 안양루와 그 뒤편에 겹쳐보이는 무량수전은 부석사의 핵심장소이다. 헌데 그 위치가 자못 의아하다. 통상 일주문에서부터 일직선으로 성소에 이르는 게 일반적인 가람배치일 터, 하지만 무량수전과 안양루는 그 축을 30도 가량 꺽어 얼짱 자세를 취한다. 그 이유는 무량수전에 올라보면 알게 된다.

 

2권역은 3개의 돌단을 쌓고 여기에 건물을 올렸다. 제일 아래 단에는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대적광전이 있었을 거라 추정되는 건물단이 발견되었지만, 복원은 되지 않았다.(현재 아래 사진에서 보이는 바로 좌측의 공간이 그 곳이다.) 대신 일제시대에 취현암과 의현각이 1권역의 축에 맞춰 각각 좌우측에 만들어졌다.

 

<범종루 쪽에서 안양루를 바라보다, 절묘한 축의 꺾임>

 

이제 안양루다. 일반적으로 루 밑을 통과하여 공간을 이동하는 방식은 영남에서 많이 찾을 수 있고, 루가 있되 루를 돌아 들어가는 방식은 호남에서 많이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전자가 직설적이고 극단적인 대비를 통한 감동에 주안점을 둔다면, 후자는 에둘러 완급을 조절하며 눈에 보이는 풍경 하나하나를 설명하려는 정감이 느껴진다. 

 

<안양루의 당당한, 기품있는 외관>

 

안양루에서 시작되는 연등에는 대통령 내외와 야당의 유력인사의 이름도 보인다.

 

<석가탄신일을 맞아 안양루에 매달린 연등>

 

이제 안양루의 어두컴컴한 1층에서 2층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 첫 계단에 서는 순간 빛을 한껏 머금어 마치 아미타불이 현신한 듯 발광하는, 아름다운 무량수전을 바라보는 순간 숨이 턱 막히게 된다. 밝은데다 규모도 압도적인 무량수전으로 인해 계단으로 올라서는 순례객들이 위압감을 느끼지 않도록 석등을 배치해, 나와 무량수전까지의 시각적 공간감을 좀 멀찍이 떨어뜨려주는 센스까지......안양루 1층에서 바라다보이는 무량수전과 석등이 바로 부석사 제3 절경이다.

 

제2권역의 축이 1권과 달리 틀어졌던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 광경을 위해 의도되었을 것이다. 즉 2권역의 축은 정남향을 향하는데, 이는 햇빛을 받아 극적인 효과를 높이려 했기 때문이라 추정해볼 수 있다.(마치 요르단의 페트라처럼 말이다.)

 

다른 설명도 있다. 제1권역은 소백산의 도솔봉을 향해 있고, 제2권역은 안산을 향해 있는데 이것이 각각 미륵정토와 미타정토를 상징한다는 것이 그것이다.(비로봉, 도솔봉 등 소백산의 봉우리 이름은 모두 정토사상에 입각해 붙여졌다)  아까 설명한 대로 (지금은 없어진) 대적광전(화엄의 주존불인 비로자나불)이 1권역의 정점이고, 무량수전(정토의 주존불인 아미타불)이 2권역의 정점이기 때문에 가능한 설명이다. 어쨋든 이 부석사라는 마스터플랜은 순례객들에게 여느 절에서는 보기 힘든 다의성, 중첩성을 이용해 계속적인 감동의 클라이맥스를 제공하려 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것이 처음부터 의도되었든 지형의 한계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짜낸 묘안이든 결과는 너무도 훌륭하게 완성되었다.

 

<안양루 1층에서 무량수전을 올려다보다>

 

온전한 형태로 보전된 석등의 단아한 아름다움은 국보로 지정될 정도다. 그런데 왜 탑이 아니라, 석등인가? 그건 무량수전에 모신 아미타불이 서방정토의 극락세계를 관장하는 부처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대웅전의 석가모니처럼 사리를 모실 탑이 필요없는 미래불이기 때문이다. 미래를 밝힌다는 의미에서 석등이 탑을 대신하고 있는 것인 셈이다.

 

<국보 24호 부석사 석등>

 

재미있는 것은 석등의 위치다. 석등은 안양루와 무량수전의 정중앙에 위치하지 않고 약간 서쪽으로 치우쳐있다. 이는 굉장히 복합적인 의미를 갖는데, 결국 안양루에서 올라와 석등과 정면으로 마주치게 된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더 넓은 공간이 열려있는 동쪽으로 이동하게 된다. 그렇다면 왜?

 

이는 무량수전에 모신 아미타불로 설명될 수 있다. 아미타불은 말했다시피 서방정토를 관장하는 부처이므로, 무량수전 내부에서는 서측에 안치되어 정동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이것 역시 보통 안치되는 부처는 건물의 정면을 바라보고 있어야 한다는 통상적인 관념과도 배치된다) 따라서 순례객들은 아미타불을 접견하려면 무량수전을 동측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이 모든게 철저히 계산되고 의도된 배치인 셈이다.

 

<무량수전 쪽에서 바라본 안양루 외관>

 

안양루는 조선시대의 다포식(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짜서 하중을 받도록 한 구조)으로 만들어졌다. 그래서인지 고려시대의 주심포(기둥 위에만 공포를 받친 구조)로 만들어진 무량수전과 대비되어 날렵한 맛을 더한다. 그런데 의도적이었을까? 공포사이에 빈공간이 마치 부처님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는 모양의 실루엣을 만들어내고 있다. 1칸에 두 분의 부처가 보이는데, 모두 합쳐 6분의 숨겨진 부처의 형상이 안양루 보 위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이를 '현현불'이라 부르는데, 예전 호기심천국이란 TV에서 방영된 것으로 안다)

 

<안양루...공포와 공포사이 빈공간이 부처형상의 실루엣으로 보이는가? 불심이 많아야 보인다고 한다>

 

안양루의 진짜 참 맛은 여기서 바라보는 태백산맥의 준령들이 아스라이 중첩되며 발아래 펼쳐지는 파노라마를 만드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사이트를 찾았을까 싶을 정도로 멋진 풍광들이 부석사라는 절의 정원이 되어 절의 영역을 시각적으로, 공간적으로 확장한다.(예전 이 지역이 신라와 고구려의 경계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군사적으로도 감시가 용이한 전략적 요충지였을 것이다) 바로 이 가슴이 탁 트이는 광대한 기상의 파노라마가 부석사 제4 절경이다.

 

<1권역 축에 맞춰 바라보다. 이날은 연무가 끼어 안타깝게도 태백산맥의 장대한 모습을 보긴 힘들었다>

 

<2권역 축에 맞춰 바라본 소백산맥의 준령들>

 

부석사에는 희귀한 고려시대 목조건축물이 2채나 있다. 바로 무량수전과 조사당이다. 그 중에서도 무량수전은 그 독특한 아름다움과 구조미학으로 인해 역사적 가치만큼이나 자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건축물이다.

 

간결한 주심포 양식에 팔작지붕을 올린 무량수전은 故 최순우 선생으로 인해 '배흘림 기둥'으로 유명세를 탔다. 배흘림 기둥은 흔히 엔타시스 방식이라 불리는 것으로 기둥이 일직선이 아니라 가운데가 볼록한 형태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이는 일차적으로는 시각적 교정을 위한 것이다. 기둥이 나열되면 사람들 눈에는 기둥들이 바깥으로 벌어지면서 불안해 보인다. 따라서 배흘림 기둥을 약간 안쪽으로 기울이듯 나열하면 이러한 불안을 해소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바깥쪽 모서리 기둥 높이를 약간 높게 해주면 완벽하게 처리된다. 이 수법은 그리스 아테네의 파르테논신전에서 멋지게 적용되고 있는데, 무량수전에서도 똑같은 수법을 볼 수 있다.

 

무량수전의 내부공간은 더욱더 차별화된다. 아까 말했듯, 아미타불이 서쪽 단변에 배치되어 동쪽을 바라보고 있어서 어떻게 보면 로마시대 바실리카를 떠올리게 한다. 더구나 보통 천장에 대는 반자를 모두 없애고 천장의 구조부재를 모두 노출시켜 공간을 시원하게 해 놓은 것도 특기할 만한 점이다. 지금보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당시에는 아마 엄청난 파격이었을 것이다. 유명세만큼이나 정교하고 아름다운 무량수전이 부석사 제5 절경이다.

 

<동측에서 바라본 무량수전 외관>

 

<무량수전의 공포와 배흘림 기둥>

 

<서측에서 바라본 무량수전 외관>

 

무량수전의 앞마당은 석등이 있고 안양루가 있는 단순한 공간이다. 그런데 무량수전 동측으로 3층 석탑이 하나 있다. 도대체 왜 저기에 3층 석탑이 있는 것일까? 크게 2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무량수전의 아미타불이 바라보는 동쪽방향에 놓인 3층 석탑은 석가모니를 상징하므로 동쪽의 사바세계를 바라보는 미래불이라는 의미를 전달함이고, 둘째는 바로 저기에서부터 3권역이 시작된다는 공간적 장치로서의 의미이다. 사람들은 무량수전을 보고 자연스레 3층 석탑으로 올라가 조사당에 이르는 3권역에 발을 내딛게 되는 것이다.

 

<3층 석탑이 바라다보이는 무량수전 앞 마당>

 

<3층 석탑의 모습>

 

나도 무량수전을 둘러보고 3층 석탑이 있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자 거기서 조사당으로 올라가기 위해 다져진 흙길이 나타났다. 조사당에 올라가기 전 무심코 뒤를 돌아본 순간 나는 축대와 건축물의 지붕들이 단차를 두고 겹쳐지며 만들어내는 전경에 넋을 잃었다. 입구에서부터 올라올 때는 건축물 하나하나가 가지고 있는 건축적 장치에 빠져들어 마치 순간순간 정지화면처럼 투시도적인 효과에 몰입했었다면, 지금 바로 이 순간에는 그렇게 지나온 길들이 모여 하나의 장관을 이루는 부석사 전체를 다시 확인하고 감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건축적 산책로를 통해 지나온 길들을 전체적으로 보여주며 다시 확인시켜주는 것......그건 르꼬르뷔제가 너무나 좋아했던 설계기법이 아니던가......천년도 더 된 고찰에서 느껴지는 세심한 배려와 솜씨가 느껴지는 이 장면을 난 단연코 부석사 제6 절경으로 추천한다.

 

<3층 석탑 뒤 조사당 올라가는 길에 본 부석사 전경>

 

제3권역에 들어서면 이전까지의 인공의 길은 사라진다. 그저 등산하듯 흙길을 따라 죽 올라가게 된다. 그러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조사당이다. 단아한 맞배지붕을 얹은 조사당 역시 고려시대 오래된 목조건축물이다. 조사당 앞에는 의상대사의 지팡이에서 싹이 나서 자랐다는 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진의야 어쨋든, 그 효험을 빌어 아들을 낳겠다는 일념으로 훼손하는 사람들이나 이를 피해 흉칙한 철책으로 가둬버린 모습은 그 자체가 흉물이다.

 

<조사당 외관, 철책으로 가둬버린 곳에 의상대사의 지팡이라는 선비화가 있다>

 

조사당을 지나 더 올라가면 최근에 지어진 2채의 건축물이 나타난다. 바로 자인당과 응진전......특히 자인당에는 인근 폐사지에서 모셔온 비로자나불 석조상(한쌍으로 보물 220호로 지정되어 있다.)이 모셔져 있다.

 

<2채의 건물이 나란히 있는데 우측이 응진전, 좌측이 자인당이다>

 

<자인당에 모셔진 비로자나불, 한쌍 중 우측에 있는 불상이다>

 

무량수전으로 다시 내려왔다. 무량수전의 좌측에는 거대한 바위가 있고, 거기에 부석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신라시대를 창건연대로 잡은 대부분의 절들에는 단골 창건인물로 등장하는 것이 바로 의상이다. 하지만 의상이 창건했다고 기록으로 확인되는 절은 단 2곳 뿐이니, 양양의 낙산사와 바로 이 곳 영주의 부석사이다.

 

의상이 당나라 유학 후 돌아오는 길, 선묘라는 중국아가씨가 의상을 흠모하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의상이 신라로 떠나버린 것을 안 선묘는 용이 되어 의상을 지켜주겠다는 말을 남기고 바다에 몸을 던졌다고 한다. 이후 의상이 이 곳에 부석사를 개창하려 할 때, 이미 사교의 무리 500명이 터를 잡고 있었고, 이를 안 선묘가 사방 1리나 되는 바위를 들어올려 그들 무리의 머리 위에 떠 있게 하니 모두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의상의 부석사 개창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의상과 선묘의 이야기는 이제 전설로나 전해지고 있으니, 무량수전과 3층 석탑 사이에 조촐한 선묘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부석사에는 무량수전과 그 앞 마당 아래 거대한 석룡이 묻혀있다고 하며, 일제시대때 그 일부가 확인된 적이 있다고도 전한다. (예전 TV에서도 역사스페셜을 통해 이를 검증했던 것으로 기억난다) 암튼 선묘가 중국인이라서였을까? 원효와 요석공주처럼 애절한 사랑이야기로 다루어지지 않고 있으나, 부석사의 이야깃거리를 풍부하게 만들어주고 있는 기묘한 전설과 그 흔적이 바로 부석사 마지막 제7 절경이 아닐까 한다......

 

<부석이 새겨진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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