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라오스 루앙프라방에서 비엔티안으로 가는 시외버스 안에서다. 6시 30분 차를 타고 10시간을 가야 하는 일정이다. 아직 어스름이 가시지 않은 새벽, 차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대부분 현지인들이고 뒷좌석 몇 개는 10여명의 서양인들이 점령하고 있었다. 영어도, 불어도, 스페인어도 아닌 말을 쓰는 것이 유럽에서 온 듯 보이는 30-40대의 관광객들이다. 드디어 버스가 출발했다. 산악지형이 많아 구불구불한 비포장 산길을 달리니 잠을 청하기도 어려웠다. 대신 이제 막 안개에 싸인채 새벽이슬에 젖은 바깥경치는 최고였다. 바로 그 때였다. 내 앞좌석에 앉은 앳된 현지인 소녀가 멀미가 났는지 안색이 창백해진다. 처음엔 그냥 참으려고 애를 쓰다가 도저히 안되겠는지 창문을 조금 열어놓는다. 사실 1월의 라오스는 새벽의 한기가 우리의 초겨울 못지 않다. 바로 뒷좌석에 앉은 나는 물론 추웠지만, 그것보다는 이 소녀가 빨리 괜찮아지기를 바라며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잠에 취해 뒷좌석에 앉아있던 몇 명의 서양인들이 일어나더니 화가 난 표정으로 뭐라고 궁시렁거리며 그 소녀가 조금 열어놨던 창문을 확 닫아버렸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그 소녀도, 나도, 주변의 현지인들도 어찌할 바 모르고 있었다. 조금 무례하긴 했지만, 소녀의 멀미를 잘 모르고 추워서 한 행동이겠지....라고 생각했다. 헌데 더 웃긴 상황이 바로 연달아 벌어졌다.
잠에서 완전히 깬 이들이 주변의 경치를 보더니 난리가 난 것이다. 멋진 풍광에 가방에서 모두들 커다란 카메라를 한 개씩 꺼내더니, 사진을 찍는답시고 주변의 모든 창문을 활짝 활짝 재끼는 것이었다. 그것도 다른 현지인들 자리까지 침범해서 말이다.
난 그 순간부터 더더욱 믿지 않는다. 서양인들이 교육을 잘 받고, 인종적으로 우월해서, 혹은 조금 잘 살거나 올바른 사고를 가지고 있어 모두가 본받아야 할 문명인의 표본이라는 그네들의 주장말이다. 설사 버스안에서 담배를 마음대로 피울 수 있고, 휴지를 창밖에 아무렇게나 버릴 수 있는 라오스라 해도, 진정 그들이 문명인이라면 그러지 않아야 한다. 다시 생각해본다. 문명인을 문명인답게 해주는 것은 이성, 도덕심, 박애주의같이 선하고 아름다운 것들이 아니라, 경찰과 쑥덕거리는 이웃에 대한 두려움같이 사소한 것들이라는 조지프 콘래드의 명언을 말이다.
그들은 뼛속까지 문명인이 아니었다. 자신들의 나라에선 벌금과 사회적 지탄이 두려워 감히 그런 짓들을 하지 못했던 것뿐이다. 그리고 여기선 돈 좀 있고 하니, 자신들이 국빈대접이라도 받아야 되는 줄 아는 비열한 속물들이었던 것이다. 내가 그 때 본 서양인들은 딱 그 정도밖에 안되었다.
<라오스의 자연경관, 출처: www.travel-to-teach.org)
12. 폴란드 크라코우의 유스호스텔에서다. 방 하나에 이층침대 3개가 놓여있는 6인실 도미토리룸 중 하나에 여장을 풀었다. 그날 저녁 일찍 잠자리에 든 나는 다음날 새벽 나머지 침대도 모두 배낭족들에게 배당이 됐다는 것을 알았다. 세수를 하고 짐을 꾸리고 있으니, 침대 이층에 있던 2명이 일어나 아는 체를 한다. 인사를 하며 고개를 돌린 나는 순간 까무러칠 뻔 했다. 이 가시나들이 상반신을 모두 훌러덩 벗은채 아래만 간신히 가리고 나에게 말을 걸고 있던 거였다. 유스호스텔 도미토리 중에는 간혹 남녀혼숙이 가능한 곳도 있어, 같은 방에서 여자애들이 잠을 자거나 해도 이제는 그닥 놀랍지도 않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 지 당황스러웠다. 그네들에겐 자연스런 문화인지 모르겠지만, 정작 옆에 있는 나만 민망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산토리니섬의 까마리 해변, 출처: www.mlahanas.de>
그리스 산토리니섬의 까마리 해변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까만 조약돌이 파란 바다와 어우러진 멋진 곳에서 일광욕을 즐기며 누워있는데 갑자기 내 앞에서 일광욕을 하던 아저씨가 벌떡 일어난다. 그리고는 해변 반대쪽(그러니까 나랑 정면으로 마주하는 쪽)으로 몸을 틀더니 바지를 쑥 내린다. 주변에 사람이 그렇게 많았건만 전혀 아무렇치도 않은 듯이 사방이 터진 공개된 자리에서 옷을 다 벗고 수영복으로 갈아입은 것이다.(도대체 그럴거면 수영복은 왜 입지? 엉?) 당황......황당......민망......상반신을 드러내놓고 일광욕하는 여자들이 그렇게 많건만 시선고정이 되지 않는 것은 아무래도 동양인뿐인 것같다.
이건 분명 프라이버시에 대한 기본 관념이 틀린 탓이다. 혼자 있을 때도 몸가짐을 단정히하라는 동양인과 남이 뭘 하든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면 관심조차 없는 서양인......옆테이블에 소금 좀 달라고 말로써 부탁하는 서양인과 다른 사람의 공간을 침범해서라도 자기가 직접 소금통을 들고와 버리는 동양인......만원 엘리베이터에서 단추 좀 눌러달라고 부탁하는 서양인과 혼잡한 틈새를 비집고 자신이 직접 누르고야 마는 동양인......생긴 것만큼이나 사고방식의 차이도 큰 것같다.
13. 러시아 쌍뜨빼쩨르부르끄(레닌그라드)의 핀란드역에서다. 에스토니아로 가는 기차를 타기 전 화장실부터 들렀다. 유럽은 맥도널드를 제외하고 어딜가도 유료이기 때문에 자연스레 돈을 주고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는데......헐! 이런 화장실은 생전 처음 봤다. 칸마다 문이 달려있긴 한데, 문높이가 정확히 배꼽정도까지다. 덕분에 노크를 하지 않아도 어느 칸이 찼는지 알 수 있긴 했지만, 일을 보면서 화장실에 들어오는 사람과 눈이 마주치는 민망함은 피할 수 없었다. 또 앉아있을 땐 간신히 중요한 부분이 가려지긴 하지만, 뒷처리를 하거나 옷을 추스릴 때는 상당히 조심해야 한다!(^^;)
화장실 문화는 나라별로 참 독특하다. 그런데 그 나름대로 그렇게 생긴 이유가 다 있다. 미국의 일부 공중화장실도 비슷한데, 러시아만큼은 아니더라도 문의 하단이 양변기에 앉은 사람의 무릎정도부터 시작하고, 문의 상단은 일어섰을 때 머리높이 정도에 불과하다. 그래서 발을 보고 사람이 안에 있는 지를 알 수 있어 노크문화가 없다. 때로는 문틈사이로 어렴풋이 안에 있는 사람이 일부러 비치게 만들어 놓기도 한다. 이렇게 만든 이유는 노숙자들이 화장실에 기거하지 못하도록 함과 동시에 자살을 방지하고 화장실에서 이상한(?) 짓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라 한다.
인도는 집에 화장실이 없다. 그래서 사람들이 새벽이면 철길이나 마을 공터로 쏟아져 나온다.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고 치마같은 옷으로 치부를 가리면서 응가를 한다. 처음에는 그 모습이 너무 미개스럽게 보이기도 했지만, 인도의 우기가 길고 비가 많이 온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하수구 정비가 부실해 모두 흘러넘쳐 전염병의 온상이 될 수 있는 화장실을 집안에 두기보다는 야외에서 그때그때 자연처리시키는 것은 꽤 나름 합리적인 방법이다.
이슬람의 화장실에는 휴지가 없다. 오로지 물통과 수도꼭지가 있는데, 일을 보고 난 후 물을 받아 왼손으로 뒷처리를 하라는 것이다. 사막기후라 나무가 나지 않아 휴지가 귀한 지역에서 고착화된 습관이다...단, 물을 사용하는 것도 오래된 습관은 아니다. 당초에는 사막의 모래로 닦았다고 하는데, 일을 본 후 씻을 곳도 없는 곳이라 먹을 때 쓰는 오른손과 뒷처리를 할 때 쓰는 왼손을 구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리라....
중국의 화장실은 정말 경험하지 않으면 그 느낌을 알 수 없다. 화장실 내 구멍만 숭숭 뚫려 있는데, 막상 일을 보러 들어가면 고민할 게 한두가지가 아니다. 어느 자리에 앉아야 할까부터 벽을 보고 앉아야 하나 중앙을 보고 앉아야 하나 고민된다. 만일 먼저 일을 보고 있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인사를 해야 하나, 또 그 사람과 등지고 앉아야 하나 고민된다. 처음엔 망설여지는데, 익숙해지면 변태같은 기분을 즐기게 된다(ㅋ) 그런데 나는 중국에 가기 전에도 이러한 화장실을 경험해본 적이 있다. 카투사로 근무하던 시절, 미군의 야전훈련장에서다. 양변기처럼 앉을 수 있는 구멍이 3개가 뚫려있었는데, 칸막이는 없었다. 그리고 폼페이의 폐허 속에서도 이런 화장실을 본적이 있다. 다른 나라의 화장실에 대한 관념은 우리네와는 많이 다른 것같다........^^
<고대로마의 화장실, 출처: affordablehousinginstitute.org>
이 외에도 사소한 것이지만 우리와 다른 생활습관과 사고방식에 당황하거나 즐거웠던 적이 많았던 것같다. 예루살렘에서는 TV에서 외화를 방영할 때, 키스장면이 나오면 화면이 2배속으로 빨리 돌아가는 것을 보고는 죽는다고 웃은 적이 있다. 보여주고 싶지 않으면 아예 삭제할 것이지 눈에 튀게 보여주는 건 또 뭔지.......요르단에서는 현지인들과 얘기할 때 눈을 보고 말을 하지 않으면, 특히 대화 도중에 눈을 피하면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한다. 싸울 듯이 덤벼드는 한 청년을 보며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한참 고민해야 했다. 불가리아에서는 고개를 가로젓는 행위가 'Yes'를 의미하는 지 몰라서 버스를 한참이나 기다려야 했던 적도 있다. 브라질에서는 '엄지손가락을 치켜드는 행위'가 그냥 '훌륭하다'는 것을 뛰어넘어 '괜찮다', '잘해봐라', '고맙다' 등 모든 의미를 함축해 사용되는데, 태국에서는 그 제스처 자체가 욕이 된다. 암튼,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듯, 해당 국가의 풍습과 전통을 존중해주는 것이 여행자가 따라야 할 제일의 기본 덕목인 것이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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