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은 섬의 남쪽 지역인 오롱고 지역을 찾았다. 먼저 높이 311m의 라노 카우(Rano Kau)를 올랐다. 역시 화산분화구가 있는 오름지역으로 갈대가 장관이다. 산 위를 오르자 저 멀리 이 섬의 가장 큰 마을인 항가로아가 보인다. 정말 거대한 문명을 상상하기 힘든 조그만 마을이다.
라노 카우의 꼭대기 근처엔 오롱고라는 유적이 있다. 바로 모아이 이후 鳥人(새인간)을 숭배하던 의식이 치뤄지던 곳이다. 케빈 코스트너가 주연했던 영화 '라파누이'에서 본 적이 있는 이 곳은 화산 꼭대기이자 해변가 절벽 바로 위에 위치하고 있는데 일단 눈에 띈 것은 제사장들이 머물던 집이다.
돌로 벽과 지붕을 쌓고는 겨우 기어서야 출입할 수 있는 입구를 낸 특이한 형태의 집들이 연달아 이어지고 그 끝에는 돌무더기들이 보인다. 그 돌들 하나하나엔 무언가 나타내고 싶은 의미로 가득찬 그림들이 새겨져 있다. 특히 사람 얼굴과 새 그림이 눈에 많이 띈다.
그리고 그 돌틈 사이로 저 멀리 자그마한 세 개의 섬이 망망대해 속에서 눈에 들어온다. 바로 조인의식이 행해진 곳이다. 이 곳에서 우두머리가 되고 싶은 자는 절벽을 타고 내려가 모투 누이라고 부르는 세 개의 섬 중 가장 뒷쪽의 큰 섬에 사는 군함새의 알 - 그것도 노른자가 2개인 - 을 가져와야만 한다. 그들은 서로 죽이거나 어떤 물리적 방법을 써서 그 알을 서로 빼앗을 수도 있는데, 아무튼 다시 알을 가지고 절벽을 기어올라온 자가 승자가 되는 것이다.
이 사진 찍느라 가이드한테 혼났다. 눈에 보이는 잔듸밭 너머로 바로 700m 높이의 수직 절벽이다. 그냥 보기에도 아찔한 이 곳에서 전사들은 상어가 득실거리는 바다로 뛰어 내렸다.
조인 그림이 그려진 바위틈에서 세 개의 섬이 보인다. 처절히 아름다운 비장한 풍경이다.
오롱고에서 내려와 비행장 뒷편에 있는 해변가 인공굴에 갔다. 일일이 사람들이 깎아 만들었다는 절벽밑의 움푹 들어간 굴에는 아직도 일부분 선명한 새그림이 붉게 남아있었다. 오롱고에서 조인의식이 치러지기 전에 먼저 이 곳에서 그 의식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동굴에서 바라본 남태평양의 바다는 투명한 청색이다. 캔버스를 정확히 둘로 자른 듯 반듯이 가로로 배어버린 그 모습은 지독히 아름답다.
이제 내륙으로 방향을 바꾸어 테파후라고 하는 곳의 주거지 동굴을 찾았다. 동굴이 너무 어두워 가이드에게 투정을 부렸더니 나에게 선글라스를 벗으랜다....으~이런!!!
동굴에선 무덤도 아닌데 사람뼈가 많이 나왔다고 한다. 이로써 식인풍습이 있었을 거라 추측하곤 하는데, 도대체 이 조그만 섬에선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어제 거쳤던 아나케나 해변을 다시 거쳐 '테 피토 쿠라'라는 곳에 간다. 11m, 20톤의 거대한 모아이가 세 동강이 나 쓰러져 있는 바로 옆 해안가엔 배꼽돌이라 부르는 세계의 중심이 있다. 아마 여기가 이스터섬 안에서 제일 신성한 구역이었으리라...
배꼽돌은 둥글둥글한 커다란 바위로 되어 있다. 있는 것은 돌 하나 뿐이지만, 그 느낌이 주는 포스는 실로 강렬하다. 그리스엔 델포이의 옴파로스가 있듯이 세상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이 사는 곳에 세상의 중심을 만들려는 경향이 있다. '중심'이란 관념은 아마 나약한 인간들에게 필수불가결한 것이리라.........
아후 아키비(Ahu Akivi)는 7개의 모아이가 서 있는 유적지다. 해변가가 아닌 약간 내륙쪽에 들어가 있는 유적인데, 다른 모아이들과 달리 바다를 보고 있는 것이 특이할 점이다.
섬 일주를 마치고 이젠 항가로아 마을 주변의 모아이를 둘러보러 나섰다. 마을 북쪽 끄트머리에는 Ahu Akapu라는 오래된 모아이가 외로이 서있다. 모습이 참 토속적인 게 왠지 모를 정감이 가는 모아이다.
이건 또다른 모아이인데 이름은 잘 모르겠다.
마을 근처에는 세련되진 않았지만 몇 개의 모아이가 더 있다. 다섯 기의 모아이가 있는 아후,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두 기의 모아이가 쓸쓸히 서 있다.
이 근처는 주거지와 같은 유구들이 심심찮게 발견된다. 바람이 세차게 부는데 빗방울도 약간 흩뿌린다.
모아이들은 모두 뜨거운 태양에 녹아버린 듯 형체에서 세월의 무게가 느껴진다.
이스터섬에 있는 모아이 중 유일하게 눈이 복원된 모아이다. 이전까지 봐왔던 모아이와 사뭇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이 모아이를 끝으로 이제 나의 이스터섬 순례는 끝이 났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토산품시장에 들러 모아이 조각상과 조인상 몇 개를 사가지고 왔다. 그런데 가격이 참 세다.
이스터섬의 묘지......바닷가에 있는 참 아름다운(?) 곳이다. 날씨가 흐려 노을을 보진 못했지만 이 곳에 앉아 이스터섬과 생사고락을 같이 했을 사람들과 역사를 생각해보며 상념에 젖어본다.
사람들은 스스로 합리적이라 자칭하는 사회적 요구 속에서 당대의 시간을 뭔가에 쫓기듯, 원래부터 당연히 그래야하는 것으로 의심없이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하지만 그가 있으나 없으나 세상은 그 도도한 시간의 흐름을 계속하고, 그가 가졌던 삶의 목적이나 이상향은 순식간에 잊혀진다. 도대체 누굴 위한, 무엇을 위한 발전이고 희생이란 말인가?
그런건 애초부터 없었던 게 아니었을까? 강자는 약자를 지배한다. 그건 역사의 불변하는 진실이다. 단지 그 표현 방식만 달라졌을 뿐......처음부터 역사는 발전을 믿지 않았다. 남는 건 권력의 진화 뿐이다.
자본주의 시대에 강자는 그가 가진 돈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그건 지금 이 시점, 역사의 흐름 중 바로 이 순간에 벌어지고 있는 상황일 뿐이다. 역사의 변덕을 믿지 마라......이건 절대로 영원하지 않다. 누군가가 아무리 성공해서 돈을 많이 벌어도 그건 그냥 현재의 시스템 속에서 스쳐지나갈 잠깐의 기쁨일 뿐이다. 그가 돈을 많이 벌기 위해 목표를 세우고 삶의 행동방식을 결정하는 건 아무런 의미도 없는 바보같은 짓일 수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일생동안 심각해하며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하면 바로 도태되어버릴 것처럼 조급해한다. 스스로 살아야 하는 이유를 합리화하기 위해 만든 이 속물적인 신화는 자신이 깨뜨리지 않는 한 마치 세상 최고의 진리인 양 눈앞에서 아른거린다.
도대체 아무런 의미도 없을 그 따위 것들을 삶의 목표인양 고귀하게 포장하는 이유가 무얼까? 허무해지지 말라고? 아니, 그거야말로 정말 절망적인 니힐리즘이 아닐까? 그냥 착각속에서 일평생 그렇게 의미없이 사는 것이, 그냥 지금 현재의 권력구조에 들어와 또다른 무의미를 찬양하다가 그걸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값진 삶이라고 사람들은 소곤거리겠지.....하지만 진짜 강한 자는 돈 많은 자가 결코 아니다.
그 옛날 군함새의 알을 가지고 왔다고 하여 영원히 강한 자가 되지 않았듯이......
진짜 강한 자는 나에게 덧씌어져 있는 이 모든 착각과 허무를 스스로 허물어내는 사람이다. 애써 그것을 '참'라고 말하며 착각 속에서 헤맬 필요는 없다. 그러나 정답이 바로 나오지 않는다고 조급해할 이유도 더더욱 없다. 그 자체가 삶의 과정이니까.......
(이스터섬의 공동묘지에서, 3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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