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본(Lisboa)......이베리아 반도의 서쪽끝 모퉁이의 유럽 변방국가, 포르투갈의 수도이다. 그만큼 가는길도 고되다. 마드리드 차마르틴역에서 저녁 10시 35분, 딸고(Talgo)라는 스페인 급행열차(그렇다고 TGV나 ICE와 같은 속도를 기대해선 안된다!!)에 올라섰다. 유럽을 배낭여행할 때 정말 유용한 것은 컴파트먼트로 되어 있는 기차들이다.(플랫폼에서 6명 내지 8명 정도 다국적 배낭족들을 모으기만 하면, 그리고 기차가 도착할 때 조금만 더 일찍 달려가 컴파트 하나를 차지하면 잠자리는 확실히 보장된다. 컴파트에는 6-8명이 한 방에 마주보고 앉게 되어 있는데, 이 좌석들을 잡아당기면 서로 연결되어 침대처럼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게 요새 개량되고 속도도 빨라지면서 야간열차도 없어지고 툭 터진 실내가 되면서 잠자리로도 영 별로다......딸고도 그랬다. 오전 9시(스페인과 포르투갈은 1시간 시차가 있으므로, 스페인시간으로는 오전 10시)가 되어서야 기차는 리스본의 상트 아폴로니에 역에 도착하는데, 온 몸이 누구에게 두둘겨 맞은 것만 같다.
리스본......유라시아 대륙의 서쪽끝.... 그 끝에서 대항해시대를 이끌었던 나라, 네덜란드 만큼이나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사람들로 인해 중세 내내 박해를 받았던 유대인들과 궤멸위기의 성당기사단들이 몸을 숨겼던 전설의 땅......에 드디어 온 것이다......
헌데 역은 정말 시골 간이역 수준이다. 변변한 인포메이션이나 부대시설 하나도 없다. 환전소에서도 환전금액의 거의 반이 수수료다. 나는 일단 유라시아의 땅끝, 로카곶을 가기 위해 역 바깥으로 나왔다. 한데 안내시설도 없고, 사람들은 영어가 서툴다. 다시 역으로 돌아가 역무원을 어렵사리 만나 가까스로 가는 방법을 알아냈다. 우선 리스본의 번화가인 바익사 지구를 걸어 로시오역까지 간다음, 도시 전철같은 기차로 종점인 신트라역까지 50분을 달리면 된다.(이 열차는 유레일패스로 무료다) 그런다음 역시 안내표지판 하나 없는 신트라역 광장의 오른쪽 버스 정류장에서 403번 버스를 타고(간격이 1시간 정도다) 40분간 마을 구석구석을 돌아 로카곶에 다다른다.
로카곶까지 먼 길이었지만, 버스를 타고 가는 와중의 경치는 끝내줬다. 빨간 기와 지붕을 얹은 하얀집, 그리고 돌길을 따라 이어진 나무들, 때론 아졸레조스라는 포르투칼 특유의 타일모자이크로 장식된 벽을 볼 수도 있다. 나중에 알고보니 신트라의 궁전과 그 경관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정도로 값진 것이었다.
<신트라의 주변 풍광>
로카곶......유라시아 동쪽에 해남땅끝마을이 있다면, 서쪽엔 신트라의 로카곶이 있다. 버스에 내리자마자 세찬 바람에 날아갈 것만 같다. 저 멀리 땅끝을 상징하는 돌탑이 십자가를 머리에 이고 서 있다. 가까이 가보니 싯구절 하나가 새겨져있다. "이 곳에서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니......" 포르투갈의 시인 카몽이스의 시다. 땅이 끝나는 곳에서 시작되는 바다를 새로운 땅으로 만들었던 포르투갈인들의 억척스럽고 긍정적인 마인드를 엿본다. 코발트빛 바다가 너무도 눈부시다.
<유라시아의 서쪽끝, 로카곶의 풍경>
<로카곶에 새겨진 카몽이스의 싯구절>
신트라에서 다시 리스본으로 나오는 길......기차 안에서 깜빡 잠이 든 나를 차장이 깨운다. 거리로 나오자 햇볕이 정말 강렬하게 타오르고 있다. 먼저 알파마 지구에 있는 상조르제성을 찾는다. 리스본 시내를 잘 조망할 수 있는 곳......고대 로마시대에 처음 만들어지고 이후 요새로서 역할을 했다고 하나, 대지진으로 무너지고 지금은 거의 공원처럼 조성되어 있는 곳이다. 실제 늦은 오후가 되자 리스본 시민들이 산책하러 많이 오르고 있었다.
조금 숨이 차오를 때 즈음, 도착한 성은 아담했다. 딱히 뭘 볼만한 것이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리스본 시내가 시원스레 발밑에 펼쳐지는 모습에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댄다. 빨간 지붕이 인상적인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만들어진 골목길과 바다같은 거대한 테주강......성 위에서 저녁식사로 난 차디찬 바게뜨를 뜯어먹었을 뿐이지만, 멋진 광경을 곁에 둔 덕에 마음은 한없는 포만감에 벅차 올랐다.
<상조르제성에서 바라본 리스본 시내>
<상조르제성의 해자와 망루>
<상조르제성의 성벽길>
<성 내부에 전시되고 있는 카라벨선 모형>
알파마지구는 정말 미로같다. 중세시대를 그대로 간직한 듯 시간이 멈춰버린 도심은 마치 내겐 아랍의 카스바를 연상시킨다. 리스본은 사실 입지 조건이 좋은 도시가 아니다. 온통 언덕으로 경사가 심한 곳에 도시가 들어섰는데, 그래서인지 도심내에서는 전차가 마주보는 건물들 사이 좁은 골목을 달린다. 26번이었던가? 대성당과 알파마지구의 관광포인트를 연결하던 전차를 타니 난 마치 서울랜드의 야외 세트장을 누비는 코끼리열차에 올라탄 기분이다. 매번 일상에 찌든 도시를 이렇게 재미있게 다닐 수만 있다면......하지만 정작 여기에 사는 사람들은 이게 또 하나의 일상이겠지?(알파마지구에서 찍은 사진들은 너무 좁은 골목탓에 소위 말하는 '뽀다구'가 나지 않았다. 카메라를 바꾸던지, 아님 사진기술을 배우던지 해야지...ㅋㅋ)
<알파마지구의 골목길>
이번엔 리스본의 심장, 벨렘지구다. 벨렘지구에서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은 저 거대한 기념비이다. 항해왕자 엔리케의 500주기를 맞아 1960년에 세운 것이라고 한다. 헌데 정작 엔리케는 신항로 개척을 위한 항해에는 한 번도 참여해본 적이 없다고 한단다. 하지만 그의 이름 앞에 '항해왕자'가 따라다니는 것은 그만큼 포르투갈의 대항해시대에 그가 기여한 바가 크기 때문일 것이다. 기념탑에도 실물크기의 그가 선두에 서서 대서양을 향해 역동적인 포즈를 취하자 선교사, 지리학자, 시인, 선원 등이 그를 뒤따르고 있다. 포르투갈의 상징과도 같은 카라벨선을 모티브로, 대항해시대를 기념할만한 역동적이고 힘찬, 누가 설명해주지 않아도 느낌이 팍팍 전달되는 기념비다.(유홍준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기념탑'이라면 전국 어디나, 기념의 대상이 되는 것의 성격과 관계없이 뾰족한 첩탑의 '뽈대'를 세우고마는 우리나라와는 문화적 품격에 대한 생각부터 남다른 것같다. 그래서 포르투갈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마치 필수코스처럼 모두 저 기념탑을 방문하게 되는 게 아닐까?)
<발견기념비>
발견기념비 인근에는 벨렘탑이 있다. 희망봉을 개척한 바스코 다가마를 기념하기 위해 16세기 세워진 등대이자 요새다. 건물 모퉁이마다 감시탑이 있고 총안이 곳곳에 뚫어져 있는데, 화려하고 섬세한 장식이 눈에 띈다. 내부관람도 가능했지만, 매번 관람시간을 놓쳤다.(리스본을 지금까지 2번 방문했는데, 모두 놓쳤다......ㅠ.,ㅠ) 내부에는 군주가 사용한 '찬란한 방'이라는 화려한 방도 있고, 만조때는 물이 차는 지하 감옥도 있다 한다.(언젠가는 다시 갈 수 있겠지?) 헌데 돌로 만들어진 이 건축물이 전혀 무거워보이지 않는다. 마치 배에서 힌트를 얻은 것처럼 디자인된 구조물은 테주강 위에 사뿐히 떠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어쨋든 뉴욕의 여신상처럼 대항해를 마치고 돌아오는 선원들에게 이 탑은 제일 먼저 반겨주는 고향의 상징같은 존재였고, 지금은 리스본의 상징처럼 되어 있다.
<벨렘탑의 위용>
벨렘지구에는 또 하나의 유명한 건축물, 제로니무스 수도원이 있다. 16세기에 지어지기 시작한 이 수도원은 무려 200년 가까이 건축되었는데 당시 포르투갈의 국력을 과시하기 위한 기념비적 건축물이기도 하다. 역시 벨렘탑과 더불어 세계문화유산이기도 하다.
수도원도 그렇지만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건축물들은 서양건축사의 일반적인 양식사조로는 명확히 구분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양식이라는 것이 사실 독일과 프랑스, 이탈리아를 잇는 중부유럽의 국한된 지역을 중심으로 정의되다 보니 원래 유럽의 변방이었던 스페인과 포르투갈갈의 건축양식은 오히려 한 템포 늦게 최신의 양식사조를 잡탕으로 받아들이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흔히들 마누엘양식이라고 불리우긴 하지만, 고딕과 르네상스, 바로크가 한데 뒤엉킨, 그냥 좋은 것은 다 갖다 쓴 절충주의 양식이라 생각하면 될 듯하다. 여기에 항해를 통해 수입된 인도양식과 원래 이 땅의 지배자였던 토착화된 이슬람 양식이 덧붙여지면서 사실 정체불명의 재미있는 모습이 나타나기도 한다. 대항해시대, 오스만제국으로 가로막혀버린 이스탄불을 대신해 이 지역은 동서양 문화가 만나는 또 하나의 크로스포인트였던 것이다.
<성제로니무스 수도원 정면>
이베리아 반도의 역사는 로마제국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후에는 이슬람의 지배를 받게 된다. 수니파의 옴미야드 왕조가 시아파의 압바스 왕조에 멸하는 와중에 옴미야드 왕조의 왕자, 라흐만이 이곳까지 도망쳐나와 코르도바를 수도로 후 옴미야드 왕조를 개창한다. 이후 서양세계의 레콩키스타(고토 회복)가 진행되면서 프랑스 왕족이 이 곳에 백작령을 두고 통치했는데 이것이 포르투갈 왕국의 시조다. 13세기에 지금의 영토가 확정되었으며, 이후 15-16세기는 인도항로를 개척하고 브라질을 발견하면서 해양왕국으로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그리고는 스페인의 지배를 거쳐 나폴레옹의 침략, 영국와 네덜란드에 의한 식민지 축소와 브라질의 독립에 이르기까지 계속 국운은 쇠퇴해간다.
전성기 포르투갈하면 떠오르는 3가지 유명한 사건이 있다. 첫번째는 14세기초 십자군 전쟁이 마무리되고 예루살렘을 지키던 템플기사단(성당기사단)들이 프랑스를 거점으로 활동하던 시기, 이들로부터 빚을 많이 지고 있던 필리프4세가 갖은 죄목을 뒤집어 씌어 기사단을 해체할 때다. 이들은 재산을 몰수당하고 화형에 처해지면서 공식적인 기사단 활동에 종지부를 찍었지만, 포르투갈은 스코틀랜드와 아울러 그들에게 안전한 은신처였다. 전설에 따르면 많은 이들이 포르투갈로 이주를 했으며, 그들의 보물(성배라 불리우는, 솔로몬의 보물......십자군 시절 그들의 본부는 예루살렘의 솔로몬 성전터였다)도 함께 이 곳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그들의 막대한 부와 종교적 정통성(성배가 무엇이었길래 교황도 어찌하지 못했던)은 유럽의 작은 변방 시골국가, 포르투갈이 갑자기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 배경이 된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항해왕자 엔리케가 템플기사단의 그랜드마스터라는 설도 있다)
두번째는 15세기말에 교황청의 중재로 맺어진 토르데시야스 조약이다. 포르투갈은 희망봉을 도는 인도항로를 개척하고 있었지만, 스페인은 자신들만의 항로를 개척하기 위해 콜럼버스를 서쪽으로 내보냈고, 드디어 신대륙이 발견되었다. 이에 중남미를 식민지화해가며 한창 국력을 키워가던 스페인은 앞으로 발견될 미정복지의 영유권 분쟁을 마무리짓고자 했다. 더 이상의 미정복지가 발견되지 않으리라 단정했던 스페인은 아조레스 제도의 서쪽을 지나는 가공의 경계선을 기준으로 서쪽은 스페인, 동쪽은 포르투갈령으로 하자는 포르투갈의 제안에 동의했다. 하지만 6년뒤 브라질이 발견되었고, 포르투갈은 인도의 고아, 말라카, 마카오를 잇는 인도양의 패권을 모두 장악하면서 독점적인 이슬람 상권을 무력화하는 일대 세계사적 변혁을 일으킨다. 그들에겐 위기를 기회로 만든 저력이 있었다.
세번째는 브라질에 관한 것이다. 브라질은 포르투갈의 가장 큰 식민지였다. 19세기 초 나폴레옹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포르투갈 왕조는 브라질로 천도를 단행한다. 그리고 8년후 다시 포르투갈로 복귀하면서 브라질에 남겨놓은 왕자가 스스로 황제라 칭하며 독립선언을 해버린다. 브라질의 지위는 이 때부터 포르투갈과 오히려 정통성을 놓고 다투게 되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전 세계적으로 포르투갈어를 쓰는 나라는 8개국 정도 있는데, 단연 브라질이 그 인구규모나 면적에 있어 압도적이다. 이러다보니, 포르투갈어 표준어는 포르투갈이 아닌, 브라질에서 사용하는 포르투갈어가 된 지도 오래다. 식민지가 본국을 압도하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식민지에만 의존적인 경제구조로 지탱해온 본국의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하니 브라질 독립과 함께 포르투갈의 전성기도 끝난 것이다.
<수도원 외관>
<제로니무스 수도원의 중정 회랑>
<수도원 중정의 분수>
<중정 회랑 상세>
<바스코 다가마의 유해가 안치된 석관>
화창하던 날씨가 갑자기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곧 비가 올 것만 같다.
화려한 조각과 부조는 18세기 리스본 대지진에도 끄덕없이 살아남았다. 그래서 이 수도원은 이제 대항해시대의 포르투갈을 말해주는 유일한 유물로 남아있게 되었다. 내부에는 왕족들의 무덤이 즐비하다. 더불어 바스코다가마, 카몽이스 등 전성기 포르투갈을 이끌었던 인물들의 유해로 가득하다.
이 수도원이 외부에 개방된 것은 20세기 들어서이다. 포르투갈인들에게 이곳은 과연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박제된 화려한 역사, 자부심의 기억, 현재로부터의 도피......어두운 현재만큼이나 이 곳에서 그들이 희망을 발견했으면 한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그들의 저력이 빛을 발하기를......다른 나라, 다른 사람들을 억압하고 착취하고 핍박하지 않고, 그들의 힘으로, 그들의 능력으로 다시 한 번 세계사의 주인공이 될 수 있기를......
예상했던대로 비가 억수같이 쏟아진다. 잠시 비도 피할겸 수도원 근처 유명한 빵집이 있다 하여 발걸음을 재촉한다.
그 빵집은 제로니무스 수도원의 레서피로 만든 유명한 에그타르트 집이다. 평소에는 줄이 길게 늘어서있다던데, 운좋게 자리를 잡고 앉아 맛을 볼 수 있었다. 에그타르트 맛이야 어딘들 다르겠냐만은, 수도원의 오래된 비법으로 만든거라 하니 뭔가 다른 맛이 느껴지는 것도 같다. 그러고 보면, 흔히들 5가지 미각으로 불리는 짠맛, 단맛, 신맛, 매운맛, 쓴맛 외에 머릿속으로 느껴지는 관념적인 심미각이 있는 것같다. 다른 감각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에두아르도 7세 공원에서>
리스본에는 포르투갈과 관계를 돈독히 해준 영국의 에드워드 7세를 위해 만든 공원이 있다. 영국과 포르투갈의 관계는 그야말로 애증의 관계였는데, 스페인 지배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것은 영국의 도움이 있어서지만, 나폴레옹이 퇴각한 후 포르투갈을 지배한 것도 영국이었고 나중에 포르투갈이 장악한 인도양의 패권을 빼앗은 것도 영국이었다. 그런 포르투갈이 영국 국왕을 위해 기념공원을 조성했다.(그런데 공원은 프랑스식이다!!) 역시 국제정치란.....영원한 아군도 적군도 없는 법인가......
저녁 8시, 이제 스페인 마드리드로 향하는 야간열차에 몸을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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