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배낭여행(8) 이스파한-숨겨진 화려함, 체헬소툰 궁
이번엔 이맘광장에서 서쪽으로 도보 5분 거리에 있는 체헬소툰 궁이다. 궁에 들어서자마자 두 명의 활달한 이란 아가씨들이 나에게 말을 건넨다. 같이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걷다가 사진 촬영을 부탁하니 흔쾌히 포즈를 취해준다......첫 인상부터 좋았던 체헬소툰이었다.
들어와서 입구쪽을 다시 찍은 사진이다. 입장료는 15만 리얄......역시 오전에 문을 잠시 열었다가 오후 3시에 다시 개관, 오후 6시 30분이면 문을 닫기에 서둘러야했다.(이란의 문화재는 철저히 관리 위주다. 관광객 편의같은 것은 기대하기 어렵다. 콧대높은 페르시아 문명의 자존심같은 것이랄까......)
입구에서부터 연못이 중심건물까지 이어진다. 연못의 크기는 가로 16m, 세로 106m에 이른다. 양옆은 정원이다. 이 정원에서 인공수로를 내어 궁전 앞과 뒤의 연못까지 물을 끌어들였으며, 연못의 물은 다시 숲으로 계속 순환토록 만들어져 있다. 기계설비를 통한 강제순환 시설이 없던 그 옛날, 이런 자연적 방식을 통해 물이 썩지 않도록 한 것이다. 페르시아 정원의 이런 독창적 특징은 전세계적으로 인정받아 2011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기까지 한다. 전국 각지의 총 9개의 정원이 리스트에 올랐는데, 체헬소툰의 정원도 그 중 하나다.(이번 여행에선 총 4개를 보게 된다.) 연못을 중심으로 메인 건물을 대칭형으로 배치하는 페르시아의 정원양식은 인도에 까지 이어지는데, 그 최고봉은 뭐니뭐니해도 타지마할일 것이다.
페르시아어로 체헬은 40을 뜻하니, 체헬소툰은 40개의 기둥이란 소리다. 궁전의 전면 도입부(파사드)는 나무기둥이 떠받혀주는 포티코 형식으로 처리되어 있다. 이는 페르세폴리스의 하렘(후궁들의 처소)을 본뜬 페르시아 전통 방식이다. 정원에서 실내를 이어주는 전이공간으로서 더할나위 없이 충실한 역할을 해주는 공간이다. 기둥은 높이 14m로 모두 20개다. 그런데 왜 이름이 체헬소툰일까? 바로 20개의 기둥이 물에 비쳐 40개의 기둥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대단히 시적인 표현이다. 이란 사람들의 심성처럼......(오후에는 역광이라 그 40개의 기둥이 보이지 않는다. 체헬소툰은 반드시 아침에 방문해야 한다.)
체헬소툰 궁은 사파비 왕조의 압바스 황제 시절 건립되었다. 사파비 왕조는 800년 이상 지속된 아랍, 투르크, 몽골의 이민족 지배를 끝내고 1501년 이란을 다시 통일한 페르시아 왕조다. 아르다빌에서 태어난 이스마일 1세가 타브리즈를 수도로 개창한 사파비왕조는 그의 증손자인 샤 압바스(압바스 황제) 시절 영토를 확장하고 수도를 이스파한으로 이전하게 된다. 체헬소툰도 그 때 지어지기 시작해 압바스 2세때인 1647년 외빈 접대용 건물로 완공되었다. 하지만 1706년 화재가 있었고, 지금 보고 있는 건물은 그 이후 복원된 것이다.
목조건물과 석조건물의 오묘한 만남은 그런대로 꽤 괜찮아 보인다. 늘씬한 나무 기둥들은 가볍게 천장을 받치고 있는 듯 보여 경쾌한 인상을 준다.
기둥 주두부분의 디테일은 예의 벌집모양인데, 가까이서 보면 아라베스크 문양이 천장 주변에 가득차 있다.
이 현관부분 중앙에는 다시 조그만 연못이 있는데, 그 주변 기둥 네개에는 각각 이렇게 사자 네마리가 그 하단부를 빙 둘러싸고 있다.
그 사자 중 한마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위엄보다는 굉장히 친근함을 강조해 코믹하게 보일 정도다. 4마리의 사자 중 중앙 연못을 향하고 있는 사자 한마리의 입에는 물을 내뿜는 빨대같은 것이 꽂혀있다.(앞사진에서 어렴풋하게나 확인 가능) 지하 어딘가로 물을 끌어들여와 기계장치 없이 수압만으로 사자 입에서 물을 뿜어 중앙연못을 만들고, 다시 그 물은 건물 앞 수로로 이어지도록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더운 날씨 탓에 이렇게 실내에 물을 끌어들여 온도를 식히는 것 또한 페르시안 건축의 특징 중 하나이다.
건물 하단부에는 이렇게 아름다운 모자이크로 장식이 되어 있다. 우리가 통상 쓰는 벽지의 디자인이 사실은 20세기 초 아방가르드들이 이란과 중동의 이런 문양을 베끼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중앙연못이 있는 현관을 지나면 거울의 홀이 나타난다. 정방형의 건물에서 입구쪽을 내부를 향해 후퇴시켜 홀을 만든 건데, 그 양옆의 벽 모습니다. 생각외로 단순하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무슨 무늬같은 게 있었던 듯, 그 희미한 밑바탕이 벽면에 아로새겨져 있다.
원래 사파비 왕조 시절만 해도, 이 건물의 벽면은 화려한 모자이크 타일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러나 사파비 왕조 이후 이란의 통일 왕조를 연 카자르 왕조는 그 화려한 벽화와 장식을 모두 회칠로 덮어버리고 그 위에 자신들의 문양을 새겼다고 한다. 카자르 왕조는 터키계(투르크계) 왕조인데, 페르시아계의 흔적을 지우고 싶어했었으리라......
이 입구 홀이 거울의 홀이 된 것은 바로 저 입구의 화려한 거울장식 때문이다. 이란에서는 중요한 건물 - 특히, 영빈관 역할을 하는 건물이나 시아파 성지의 건물 등에는 화려하게 거울로 장식을 했다.
홀을 지나면 조그만 전실이 나오고, 조금 더 들어가면 메인 홀이 나온다. 조금 어두침침하긴 한데, 눈이 휘둥그래지는 화려한 벽화로 인해 현란한 느낌이다. 벽화는 입구문 쪽에 3개, 반대편에 3개의 큰 그림이 그려져 있고, 그 사이사이에 조그만 그림들이 채워져 있다. 총 6개의 큰 그림 중 2개는 카자르 시대의 것이지만, 나머지 4개는 모두 사파비 시절의 원본이다.
아래 사진은 입구문 쪽 3개의 큰 그림 중 가장 왼쪽의 것이다. 압바스 2세가 투르키스탄의 나다르 칸을 환영하는 장면이다.
조금 더 가까이에서 본 모습이다. 몽골의 잦은 침략으로 곤란을 겪고 있는 투르키스탄의 나다르 칸이 압바스 2세(왼쪽)에게 도움을 청하는 장면인데, 등장하는 인물들의 자세와 복장이 참 인상적이다. 투르크계가 이후 이란을 점령해 카자르 왕조를 연 것과 비교해보면 참으로 아이러니한 역사다.
바로 그 오른쪽 벽화는 샤 나데르 황제와 인도 술탄 모하메드와의 전쟁모습이다. 샤 나데르 황제는 사파비 왕조 이후 등장한 아프샤르 왕조의 초대왕이다. 모두 4대에 걸쳐 약 60년간 이란을 지배했다. 1756년 벌어진 카데르 전투에서 승리한 샤 나데르 황제(왼쪽 갈색 말을 타고 오른손을 치켜든 이)는 술탄 모하메드(하얀 코끼리위에 탄 이)를 물리치고 델리를 점령한 후 많은 보석들을 약탈해오는데, 현재 그것들은 테헤란의 보석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사람들로 꽉 채운 전쟁장면은 보는 것만으로도 긴장감이 넘칠 정도다.
샤 나데르는 사파비 왕조의 군벌이었다. 사파비 왕조 말기, 아프간의 침공으로 아프간 부족장이 왕위에 오르는 등 혼란기에 쿠데타를 통해 왕위에 올라 스스로를 황제라 칭하고, 아프샤르라는 왕조를 열었다.
입구문 위쪽 3개의 그림 중 제일 오른쪽 그림 역시 전쟁그림이다. 사파비 왕조를 개창한 샤 이스마일(이스마일 1세)이 우즈벡과의 전투를 벌이는 장면이다. 이스마일 1세는 1511년 우즈벡의 메르브라는 곳에서 우즈벡 군대를 대파하고 영토를 확장한다. 벽화는 당시 전쟁 중 우즈벡 황제를 죽이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일설에 따르면, 이스마일 1세는 우즈벡 황제의 두개골에 보석을 박아 술잔으로 사용했다고 한다.(믿거나 말거나....하지만, 이스마일 1세가 당시 이란에 뿌려놓은 업적은 현재의 이란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키워드들이 많다. 시아파를 국교로 삼고, 신정체제를 구축하였으며, 시아파 성지를 포함해 현재의 이란영토를 모두 확보한 - 물론, 카자르 시대 그루지야, 아르메니아, 아프가니스탄 등을 잃어버렸지만 - 인물이기 때문이다)
무시무시한 전쟁그림이 있는 입구쪽에 비해, 그 반대편 그림들은 연회의 장면들이 많다. 이곳에서 맞이했던 국빈들에게 보내는 무언의 메시지랄까......당근과 채찍의......ㅎ....밥 편히 못 먹었겠당!
반대편 벽의 제일 오른쪽은 압바스 황제(압바스1세)가 주재하는 연회장면이다. 1621년 투르키스탄의 왕 모하메드(왼쪽에 앉은 이)가 우즈벡 침공을 당한 후 압바스 황제(오른쪽 황금색 옷의 황제수염을 기른 이)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장면인데, 이 그림에서 재미있는 것은 바로 아래에 있다.
바로 벽화 하단부에 있는 이 그림인데, 서로 얼굴을 맞댄 묘한 포즈나 손의 위치가 참 의미심장하다. 동성애를 표현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슬람에서 동성애라니......참으로 까무러칠 일이다. 우리는 이란을 경직된 이슬람 원리주의 국가로 알고 있지만, 실상 이란에서 직접 느끼는 것은 사우디나 카타르 같은 국가들보다도 더 큰 자유분방함다. 여성들의 사회적 활동만 봐도 확연히 차이가 날 정도다.
제일 왼쪽의 그림은 1543년 인도에서 망명한 무굴제국 왕자 후마윤을 맞아 사파비 2대 황제, 타흐마스프가 연회를 베푸는 장면이다. 후마윤은 동생과의 권력다툼으로 잠시 망명하였다가 타흐마스프 황제의 도움으로 무굴제국의 2대 황제가 된 인물이다. 인도 델리에서 보았던 후마윤의 무덤 주인공을 다시 이란에서 보게 될 줄이야......(후마윤의 무덤은 타지마할의 원형으로 알려질 정도로 페르시아의 영향을 많이 받은 곳이다. 물론 세계문화유산이기도 하고....) 아뭏든 이 그림은 18세기 아프간 침입 당시에도 살아남은 오리지널 그림이라 한다.
입구 반대편 벽의 정중앙에 있는 벽화는 또 전쟁그림이다. 사파비 초대 황제, 이스마일 1세가 1514년 오스만투르크와 맞붙은 찰디란 전투를 묘사한 것이다. 수니파였던 오스만투르크와는 중동의 패권을 놓고 앙숙관계였었는데, 이스마일 1세는 이 전투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게 되지만 타브리즈를 빼앗기는 불운을 겪게 된다.(이로부터 10년후 이스마일 1세는 36세의 나이로 죽는다) 오른쪽 백마를 탄 이가 바로 오스만투르크의 셸림1세 황제이다.
천장을 올려다본다. 아직 복원을 다 못한 듯......카자르 시대와 아프간족에 의해 회칠로 훼손된 장식이 선명하다.
이 6개의 큰 벽화 외에도 조그만 그림들이 아주 많았는데, 대부분 남녀의 애정행각을 그린 것들이 많다.
홀 한 켠에는 이런 부조도 전시되어 있는데, 아마 하부 벽면을 복원하기 위한 것이리라......
이 코란은 원래 이 궁전 현관문 위에 놓여져 이 궁전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의 행운을 빌던 것이었다. 10세기, 손으로 필사된 책이다.
입구로 다시 나와 수로와 출입구를 바라본다.
체헬소툰 궁전의 뒷부분 모습이다.
외벽에도 많은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주로 여인상이나 미인도들이다.
궁전의 옆 벽면 모습이다.
수로에는 사자머리를 받치고 있는 네 명의 여인상이 놓여져 있다. 사자는 예전 이란 국기에서도 나오지만, 이란 황실의 상징적 동물이다.
증명사진도 하나 찍고......
역광이라 뿌옇게 나왔지만, 정말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하고 더운 날이었다. 이제 조금 더 남쪽에 있는 하쉿베헤쉿 궁전으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