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요셉 어메이징'(2013.3.22)
참 유쾌한 뮤지컬이었다. 별나고 독특한 희곡 오페라, '징슈필'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심각할 것도, 엄숙할 것도 없이 그냥 재미있게 밝고 경쾌한 곡들을 시간가는 줄 모르고 웃고 즐겼다. 정동하의 탁월한 노래실력, 노래와 춤으로 극을 이끌어가는 독특한 감성의 김선경 캐릭터 모두 최고였다.
줄거리는 뭐 웬만한 사람이면 다 아는 구약성서 스토리다.(창세기 37-50장)
요셉은 야곱의 막내 아들인데, 아버지로부터 색동옷을 선물로 받을 만큼 사랑을 독차지했다. 요셉은 어느날 꿈이야기를 하는데 형들이 자기한테 절하는 내용이었다. 형들은 요셉을 싫어하여 대상에게 요셉을 노예로 팔아버리고 아버지에게는 죽었다 거짓말을 한다. 요셉은 다시 이집트 보디발이라는 부자에게 팔려 하인으로 일했는데,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하려 하다가 죄를 뒤집어 쓰고 감옥에 갇힌다. 요셉은 마침 감옥에 같이 갇힌 죄수 두 명의 꿈을 해몽해주는데, 한명은 파라오의 시중, 한명은 파라오의 요리사였다. 해몽을 통해 시중은 살아남고 요리사는 사형당할 거라는 사실을 정확히 풀어낸 요셉을 나중에 파라오의 시중이 파라오에게 소개시켜준다. 이 시기 파라오는 이상한 꿈으로 고민에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요셉은 꿈이야기를 듣고 7년 동안 풍년이 들었다가 다시 7년 동안 흉년이 들 것이라고 예언하며 훌륭한 인재를 발굴해 대비책을 세워야 한다고 조언했다. 파라오는 요셉을 이집트의 총리로 삼았다. 몇년 뒤 흉년이 들자 그의 형제들이 이집트를 찾아왔고 식량을 구걸했다. 요셉은 형들의 마음을 시험해보기 위해 음식을 베푸는 척 하며 황금술잔을 형제 중 한 명이 훔친것처럼 위장한다. 형제들은 죄를 뒤집어 쓴 한 명의 형제를 구하기 위해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고, 형들의 착한 마음을 깨달은 요셉은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모두를 놀래킨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요셉은 극적으로 아버지와 재회하게 된다.
이 극적인 스토리는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기도 했는데, 아마 착하고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은 결국에는 성공하게 된다는 윤리적 인과응보의 전형을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뮤지컬은 이 불후의 고전 내용을 조금의 각색하지 않았다. 대신 현대적 감각에 맞춰 등장인물들을 묘사하고 있는데, 골프채를 메고 다니는 보디발의 모습이나, 엘비스 프레슬리로 분장한 파라오같은 상황이 극의 무게를 꽤 많이 덜어준다. 뮤지컬의 내용을 전혀 알지 못한 채(사실 난 요셉이 구약이 아닌 신약의 요셉으로 짐작하고 있었다) 공연을 관람했던 난 진지함과는 동떨어진 유쾌하고 가벼운 내용에 연신 웃고 즐거워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뮤지컬에 나오는 노래는 20세기 팝의 리듬을 모두 선보인다. 맘보와 레게, 락큰롤과 디스코, 발라드에 이르기까지 아마 이 작품을 처녀작으로서 선보인 앤드류 로이드 웨버(우리에겐 오페라의 유령과 캣츠로 더 유명한)가 자신의 재능을 극장주들에게 어필하기 위해 음악적 역량을 뷔페처럼 늘어놓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착한 일을 하면 성공한다는 구약의 요셉 이야기는 다분히 결과론적 교훈이다. 내용 어디서 요셉이 착한 일을 했다는 건지 사실 난 알 수 없다. 사람이란 누구라도 자신이 손해볼 짓은 전혀 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말이 맞다면(심지어 기부나 적선, 봉사도 해석하기 따라서는 그러하다!) 살면서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매 선택의 순간에 그가 기준으로 삼는 것 역시 자기 자신의 이익이다. 그렇다면 요셉이 보디발 아내의 유혹을 물리친 것은 유혹을 받아들여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별로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가 유혹을 받아들여 자유인이 된다거나, 심지어 보디발을 내쫓고 그의 재산과 아내를 독차지할 가능성이 희박했으며(보디발은 일부에 따르면 이집트의 환관이었다. 노예신분으로 이집트 관리를 농락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설사 그러한 마음을 먹었더라도 그것을 실행에 옮길만한 그의 의지가 너무 약하다는 걸 스스로가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이도저도 아니면, 보디발의 아내가 너무 천박하거나 아름답지 못해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았을 수도 있다. 주인의 아내를 농락했다는 죄를 뒤집어 쓰고 감옥에 가서 차라리 몇 년 썩는 것이 오히려 그에겐 알맞은 기회비용이었으며,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됐다. 후세 사람들은 그런 그의 행동에 십계명을 들먹이며 도덕적 행위, 신의 계율을 지킨 영웅으로 칭송하지만, 그는 꿈을 해석하는 탁월한(?, 아니 그럴듯한) 능력과(사실 해몽이야말로 '몇 달안에 당신 집안에 좋은 일 2건과 나쁜 일 2건이 생길 것이오'라고 말하는 점쟁이와 다를게 뭐가 있나? 결국 좋은 일, 나쁜 일은 점쟁이가 정해주는 게 아니라 점쟁이집에 찾아간 의뢰인이 추후 입맞에 맞게 해석하게되는 게 아닌가? 기준이 모호한 풍년이니 흉년이니 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마침 파라오의 노여움을 산 시종장과 요리사가 감옥에 갇히는 운때가 맞아 절묘하게 이루어진 '사건'일 뿐이다.(물론 그 '운'조차 하느님이 계획하신 계산이라고 하면 할말은 없지만, 하느님이 왜?) 인간들이 도덕적 관념을 선험적으로 가진 고귀한 존재라면, 굳이 이런 사례를 들먹일 필요도 없었을 것이며 하느님이 몇몇을 이렇게 살뜰하게 챙겨줄 이유도 없을 것이다. 이런 사례가 받들어져 칭송되는 것을 보면 오히려 세상은 정반대가 아닐까? '착함'이라는 세상이 덧씌운 가치는 그래서 음흉한 권력의 단어다. 하느님의 권능까지 입힌 '착함'은 더더욱 그러하다. 착하지 않고도 잘먹고 잘사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이 세상에서 '착함'은 조롱당하고 멸시당한다.
뮤지컬의 주제곡은 "Any Dream Will Do"이다. 꿈을 꾸는 자는 어떤 꿈이든 이룰 수 있다는 희망적 메시지, 시쳇말로 힐링(치유)의 컨셉이다. 하지만 정작 요셉은 이집트 총리가 되겠다는 꿈을 꿨는지도 불분명하고, 그 꿈을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잘 모르겠다. 그저 형들의 미움을 사 노예로 팔려가서 운좋게 권력자가 된 인물일 뿐이다. 그러면서 어떤 꿈이든 노력하면 이룰 수 있다는 노래를 불러댄다. 넌센스고 경박하고 코메디다. '착함'을 은유적으로 비틀고 비하하는 위트와 재치, 내가 뮤지컬을 보며 즐거워했던 이유다.(정작 뮤지컬의 대가, 앤드류 로이드 웨버와 팀 라이스가 실제 그런 의도가 있었는 지 난 잘 모르겠다. 그들의 작품세계를 보면 충분히 그러할 듯도 싶고......아뭏든 이것도 그럴싸한 해몽이 아니겠는가?...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