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이야기(6)-광장의 유쾌함
광장!....우리에겐 아직도 낮설은 이 단어가 요사이 몇 년간 자주 얘기되고 있는 것을 보면서 광장이란 공간이 가진 매력이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유럽의 고풍스런 중세도시 어딜가도 광장은 존재한다. 그것도 구시가의 가장 노른자위땅 중심가에 교회나 시청을 끼고 만들어져있다. 이 아까운 땅에 웬 빈 공간? 그러나 자세히 보면 광장이란 공간은 그 곳을 집으로 가득채웠을 경우에는 결코 얻지 못했을 많은 풍요로움을 우리에게 준다.
몇 년 전 '시네마천국'이란 영화를 본 적이 있다. 그 장면중에 마을의 집들로 둘러싸인 광장이 나온다. 여기선 가끔 영화가 상영되곤 한다. 집 담벼락을 스크린삼아 틀어놓은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그러나 스크린을 향해 질서정연히 배열된 의자에 앉아 있지 않는다. 그저 되는대로 광장으로 난 자신의 집 현관입구에 걸터앉고, 술집의 야외테라스에서 혹은 여기저기 창가에서 얼굴만 내밀며 아이들은 분수대에, 주차해놓은 차위에, 심지어 나무위에서까지 영화를 감상한다. 영화를 틀어놓은 그 순간 광장은 그 주변을 하나의 거대한 극장으로 바꿔버린 것이다. 그것이 내가 가진 '광장'의 이미지이다.
그래서 난 유럽에 가면 이른 아침 방문하는 시장과 더불어 일요일 오후엔 항상 광장을 찾는다. 그곳은 아침 미사를 마치고 나온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테라스에서 커피와 담소를 즐기는 여유있는 공간이다. 아이들은 비둘기몰이를 하며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그 사이를 삐에로 복장을 한 거리의 예술가들이 휴일 오후의 넉넉함을 더해준다. 이런 환경에서라면 사람들은 이웃을 만나기위해 동호회에 꼭 가입할 필요도 없으며, 인터넷 채팅을 위해 골방에 마냥 쳐박힐 필요도 없다. 어울리기 위해선 밀폐된 술집을 찾을수밖엔 없는, 그래서 결국엔 파편화된 우리의 인간관계가 건물로 가득가득 채워진 우리의 도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일까?
<이태리 베니스의 산마르코 광장>
사람들은 개방된 광장에 모여 정치를 논하고, 이것은 항상 유럽의 역사를 이끌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쟁이 벌어진 아고라광장에서 마리 앙뜨와네뜨가 처형당한 콩코르드 광장까지 광장은 사람들에게 자연스레 남들에 대한 배려를, 이해심을, 토론을 통한 합의를, 예술을, 휴머니즘을 가르쳤다.
그러나 광장은 우리가 받아들이지 못할 서양식 문화만은 아니다. 가회동의 한옥마을을 답사하다보면 우리도 광장문화가 있었음을 알게된다. 기와를 인 담벼락을 끼고 비워져 있는 자그만 공터에는 한여름밤 마을사람들이 몰려나와 평상위에서 얘기꽃을 피우느라 정신이 없다. 늦가을에는 그 곳에서 김장을 함께 담그고 겨울엔 아이들의 놀이터가 된다. 시골의 여느 마을에서도 당산나무 한 그루씩은 있기 마련이고 그 아래는 어김없이 마을어른들의 공회당이 된다. 비록 교회나 시청은 없어도 그 곳이 우리의 광장인 셈이다.
<가회동은 아니지만, 골목길에서 볼 수 있는 조그마한 광장>
텅 빈 공간을 광장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바로 사람들이다. 도심 한 가운데 콘크리트로 포장된 넓은 공간 하나 만들어주었다고 광장이 되는 건 아니다. 다시 말해 공간속으로 사람들이 엉겨붙어 그 공간을 정신적인 풍만함으로 꽉 채울 때에야 비로소 광장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더위를 피할 수도, 시끄러운 자동차경적으로부터 편히 쉴 수도, 거기 머물러야 할 어떤 이유를 발견할 수도 없는 텅 빈 공간에선 그저 지하도로 다니지 않게 된 것만을 감사할 수도 있다.
머무를 수 있는 광장이 없는 도시는 오로지 출발점과 도착점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둘을 연결할 가장 효율적인 최단거리 경로만을 위해 도시는 재구성된다. 사람들은 주변에 신경 쓸 겨를 없이 오로지 더 빨리를 외치며 앞만 응시한다. 그 사이 우리는 잃어버린 게 너무 많다.
그렇다면 사람들을 광장에 엉겨붙게 만드는 요인은 진짜 무엇일까? 도시를 구성하는 건축과 도로 등의 물리적 환경은 어떻게 그걸 가능하게 할 것인가? 서울 시청앞과 광화문, 남대문 등이 이미 광장으로 조성되었거나 또 조성될 예정이라고 한다. 우리는 여기서 그동안 잊고 살았던 우리의 '광장'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인지 흥미로운 시도를 당분간 보게 될 것 같다. (2004.3.9)